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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0 부활 제7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29 조회수799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9,1-8
1 아폴로가 코린토에 있는 동안,
바오로는 여러 내륙 지방을 거쳐 에페소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제자 몇 사람을 만나,
2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
그들이 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바오로가 다시 그러면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요한의 세례입니다.”
4 바오로가 말하였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님을 믿으라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5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7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8 바오로는 석 달 동안 회당에 드나들며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담대히 설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

18.23의 갈라디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말한다.

 

2

2-6은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18.25의 주제를 대화체롤 풀어 설명하고 있다.

 

이 질문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제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를 분명히 구분하기 위한 수사학적 질문으로 이해야 한다.

 

4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자기 뒤에 오시게 될 그분, 곧 예수를 믿으라고 권고했다.

 

5

이름과 세례의 연결에 대해 2.38; 8.16; 10.48 참조.

 

6

세례 예식을 마무리하는 안수로써 성령이 내리게 된다. 사마리아 선교에서처럼 성령의 내림은 세례 그 자체가 아니라 안수에 동반된다(8.17). 고르넬리오 이야기에서처럼 무아경에서의 언어는 영적인 힘이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물리적으로 증언한다(10.46 참조).

 

7

을 숫자 앞에 넣는 것은 루카의 글쓰는 습관이다. 12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상징적 숫자다.

 

8

바오로는 이방인 선교로 돌아섰다고 공시적으로 천명했는데도 다시 한번 유다인 회당에 모습을 보인다. “확신을 갖고또는 당당하게는 사도들의 예언자적 또는 철학자적 언변을 묘사할 때 루카가 사용하는 단어다. 바오로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예수의 선포에 이어지며 동시에 예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루카 9.2).

 

 

 

 

 

 

 

복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9-33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29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30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30

예수의 말에 대한 의심이 내포된 질문이다. 제자들의 부족한 통찰 또는 몰이해와 약점이 간접적으로 지적된 셈이다. 이런 관점은 32절과 연관시켜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31

제자들의 믿음에 대한 의심이 내포된 질문이다. 제자들의 부족한 통찰 또는 몰이해와 약점이 간접적으로 지적된 셈이다. 이런 관점은 32절과 연관시켜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32

예수의 수난 때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흩어져 자신의 안전만 찾게 된다는 뜻이다. 공관복음의 전승에 요한복음의 설명이 가미된 셈이다. 현 문맥에서는 제자들의 열광적 자기확신을 완화시키고 그들의 배신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이 완성된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며 언제나 위험 속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시간이 오고 있다에 대조되는 상황변화를 가리킨다. , 부활 이전과 이후 상황이 대조된다. 이 상황변화는 예수가 세상을 이김으로써 이루어진다.

 

수난 때 제자들이 예수를 홀로 내버려두고 떠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와 언제난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수난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예수의 이 모습은 공관복음이 전하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십자가상에서 외치는 모습과도 대조를 이룬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에 대한 저자의 신학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십자가사건을 들어올려지는사건으로서 영광스럽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33

고별담화를 마무리하는 표현이다. 14.25와 같은 맥락이고 병행한다. 14.251차 고별담화의 결말에, 여기는 2차 고별담화의 결말이다.

 

평화를 예수가 제자들에게만 주는 이별의 선물로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환난을 겪으면서 살아갈 제자들을 위한 예수의 바람이요 약속으로서 언급한다. 제자들은 예수 안에서평화를 얻어야 하고, 다른 곳에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와 결속관계 안에서만 기쁨을 얻듯이(22) 평화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미래적 의미가 담긴 현재 형태다. “세상에서예수 안에서환난평화와 대조된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언제나 환난을 겪겠지만, 예수 안에서는 반대로 언제나 평화를 얻게 된다는 뜻이 더욱 강조된 셈이다.

 

세상의 두목에 예수에 대해 아무 권한이 없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는 부활사건으로 입증된다. 예수 안에서 얻은 제자들의 평화는 세상을 이긴 예수의 평화이므로, 세상에서 환난을 겪더라도 예수를 믿고 예수와 함께한다면 그 세상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힘을 내시오라고 제자들을 격려한다. 세상에 대한 예수의 승리는 제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근거요, 제자들이 얻어 누릴 수 있는 평화(구원의 기쁨)의 내용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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