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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31 조회수885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나는 하느님께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굳건히 세우시고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그것을 나누어 주실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0,28-38
그 무렵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28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31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33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34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35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36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7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28

루카 시대에 유다교의 관습에 맞추어 원로제도가 지역교회 안에 자리잡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가 증언하는 본격적인 교계제도와은 아직 거리가 있다. 백성을 양떼라는 표상으로 묘사하는 대목은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한다.

 

29

영웅이 죽은 뒤에 악이 닥쳐올 것이라는 예언은 고별연설이 또 다른 전형적인 표현이다. “이리의 표상은 초대교회의 문헌에 보편적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바오로의 경고는 공동체를 멸망으로 이끄른 이단에 관한 것이다.

 

30

위협은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온다. 거짓을 말하는 이단자들이 공동체 자체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

 

31

깨어 있으라는 권고는 예수의 바오로의 가르침에 자주 등장한다. “기억하라는 부탁은 헬라계 문헌의 권고문에 자주 나오며 동시에 고별담화에 자주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바오로는 잘못된 길에 빠질 위험에 처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깨어 있으라고 충고해 왔음을 상기시킨다. 이로써 루카는 바오로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목자로서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잘 묘사한다.

 

32

이 구절 맨 앞의 이 제는 고별연설이 마지막 부분에 들어섬을 알린다. 연설이 마지막 부분은 바오로의 축복과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당부로 구성된다. 바오로는 자기가 이제껏 돌보아온 이 공동체를 하느님과 그분께로부터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맡긴다. 그 은총의 말씀은 공동체로 하여금 현재의 안정을 누리게 하는 동시에 미래의 영원한 구원을 약속한다.

 

33

바오로는 고별연설의 마지막에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교 목자들이 지녀야 할 모범적 생활자세로 제시한다. 그는 물질적 탐욕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스스로 노동을 하여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조달했고 나아가 궁핍한 동료들의 필요까지도 충족시켰다. 18.3에서 루카는 바오로의 직업이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조달했고 나아가 궁핍한 동료들의 필요까지도 충족시켰다

 

18,3에서 루카는 바오로의 직업이 브리스킬라와 아퀼라의 직업과 같은 천막 만드는 일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어려운 공동체의 재정에 의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 애덕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가 스스로의 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해나갔다는 루카의 증언은 바오로 자신의 말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바오로의 서간 어디에도 자신의 노동으로 다른 사람들의 경제적 어려움까지 해소시켜 주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35

현존하는 복음서에서는 주님의 말씀으로 소개된 이 말씀을 확인할 수 있다. 약간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내용이 클레맨스 12.1에 있고, 비슷한 ㅍ현이 유다교 지혜문학과 몇몇 그리스 문헌에 나온다. 그러나 이 말씀의 핵심사상은 루카 6.35-36.38에 나타난다.

 

36

고별연설을 마친 뒤 무릎꿇고 기도했다는 내용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 말씀을 마치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 무릎꿇고 기도하셨다는 루카 22.39-를 연상시킨다. 설교가 끝난 다음 공동체와 더불어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은 루카 당대의 종교적 관습이었던 것 같다.

 

37

이 구절은 창세 33.4에서 볼 수 있는 성서적 색체로 장식되어 있다. 바오로가 원로들과 함께 나눈 입밪춤은 단순한 인사를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입맞춤이 아니라 슬픔과 애정이 담뿍 담긴 이별의 입맞춤이었다.

 

 

 

 

 

 

 

 

 

복음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9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2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3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7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11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하는 동기가 시사된다. , 세상에 의롭게 남을 제자들의 실존을 적정하는 예수의 마음이 하느님께 대한 기도로 표명된다.

 

구약성서와 유다이즘에서는 하느님의 신성을 거룩한이란 말로 표현한다. 이 표현은 세상을 초월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경의를 드러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시사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의미가 다르다. 우선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가 시사되고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기도와 관련된다.

 

특히 제게 주신 당신의 이름으로 기키시어...”란 말에 직결된다. 아들에게 당신 이름을 주신 아버지를 뜻한다. “거룩한 아버지란 말은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가리키므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에 더 밀접한 표현이다.

 

6절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우선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킨 자들을 하느님이 지켜주시기를 청한다. “당신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예수가 그들에게 계시한 아버지의 이름을 가리킨다. 아들 예수가 계시한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께서 친히 아들에게 주신바로 그 이름을 뜻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 요청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계시한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 그대로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지켜달라는 것을 뜻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제자들도 일치된 공동체를 이루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예수의 이 요청은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하나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기반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른 하나는, 이 일치는 신적 본질 또는 실존, 곧 표현이요 표징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12

예수 자신이 제자들을 위해 행한 일이 제게 주신 당신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으로 강조된다. 이 표현은 예수가 제자들의 믿음과 구원을 돌보는 것 그 이상을 뜻한다. , 예수 자신이 몸소 하느님에게서 체험한 사랑과 기쁨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며 또한 전달하고 하느님의 생명에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내적으로 열어보이는 것을 뜻한다.

 

배신자 유다를 가리킨다. “멸망의 아들이란 표현에는 유다가 예수의 보호에서 벗어나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 자신이 정당한 입장을 밝힌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된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고 멸망하게 된 것을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하느님 구원계획에 따라 이해한다. 여기서, 초점은 유다를 읾은 것이 예수 탓은 아니며, 예수는 제자 보호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이다.

 

13

예수가 제자들에게 약속한 기쁨이 기도 가운데 엄급됨으로써 제자들에 대한 예수 자신의 원의가 표현된다. , 예수는 세상에 외롭게 남을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이 취한 그 기쁨과 평화를 주어서 그들이 증오와 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도 잘 견뎌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하느님의 보호를 간구한다. 이것은 성령이 언급된 예수 고별담화와 하느님의 보호가 언급된 예수 기도의 대조적인 한 단면이다.

 

14

아버지의 이름대신 말씀이 언급될 뿐 6절과 맥락이 같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계시했다는 뜻이다.

9절에서 시사된 세상제자들의 대립상황이 강조되고,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도 표현된다.

 

15

9절에서 세상에 파견되었음이 전제되며 그들을 악에서보호해 달라는 데 역점이 있다. “세상의 두목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은 예수와 대립하나 예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고 예수는 오히려 영광스럽게 되는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이 지배하는 세상을 이겼다. 따라서 은 제자들에게도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세속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거나 오염되지 않도록 기켜 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16

14ㄴ절이 반복되나, 15절에 이어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17

제자들을 거룩하게해달라는 이 요청은 악에서 지켜달라는 요점 보다 깊은 적극적 의미를 지닌다. 이 두 요청은 두 측면에서 결속되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제자들을 선별하고 진리로거룩하게 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진리로는 상응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 요청은 제자들이 하느님의 영역에 들어가 계시 말씀에 따르는 봉사를 철저히

 

할 수 있도록 지켜 달라는 뜻이다. 이 요청은 예수가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한 것과 결속되어 있다. , 제자들은 세상에서 활동하기 위해 진리로 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졔시한 하느님의 말씀 곧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달음로써 참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하느님께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

예수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무장되어 세상에 파견되었듯이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파견이 여기서 과거 형태로 포현된 것은 우선 예수의 기도가 편집된 시점에서 언급되기 때문이고 또한 제자들의 파견을 예수 자신의 파견과 밀접하게 병행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당시 공동체는 자신들의 파견소명과 그 의식을 예수의 파견에서 연역하고자 했으리라. 이 구절은 15절과도 관련되어 있다. 즉 예수가 하느님께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보다 악에서 지켜 달라고 청한 것은 그들을 세상에 파견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을 거룩하게 해달라는 요청으로 예수의 원의를 더욱 고조된다. 즉 예수는 자신의 파견을 제자들의 파견에까지 연장하려고 하느님께 간청한다.

 

19

예수는 하느님이 파견하신 거룩한아들로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고 하느님의 영역까지 이끌 수 있었다. 이제 예수의 그러한 일을 위임받아 수행하기 위해 제자들 자신도 거룩해져야 한다. 바로 여기서 예수의 중개 역할이 강조된다. 예수는 제자들도 거룩해지기 위해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 행위는 표현상 대속적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죽음은 아들 예수의 자유의지와 함께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강조된다.

 

위하여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또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음으로 헌신함을 뜻한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도 해방절 희생제로 시사된다.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보다 거룩하게 하다란 희생제물에 관한 동사로 이해할 수 있다. 칠십인역성서에서 이 동사는 제물로 바치는 짐승을 신성시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희생제 예절을 주관하도록 제관들을 축성하는 것도 바로 이 동사로 표현한다.

 

히브리서에서도 예수를 대사제요 희생제물로 언급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자들을 거룩하게 되었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 기도는 자신의 속죄 죽음을 가리키는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만찬례 전승, 곧 성체성사 말씀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관한 언급이 핵심을 이루며 제자들은 파견된 실존 안에서 그 사실을 깨닫고 터득해야 한다는 의미가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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