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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5 수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1-24 조회수458 추천수0 반대(0) 신고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교육받은 철저한 유다인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한 뒤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신하였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9,1-22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21 그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놀라며, “저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자들을 짓밟은 자가 아닌가?
또 바로 그런 자들을 결박하여 수석 사제들에게 끌어가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2 그러나 사울은 더욱 힘차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여,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다인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주님의 현시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감옥에 압송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던 극단적 박해자가 돌변하여 다마스커스의 유다인 회당들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게 되는가? 루카는 성령강림사건에서처럼 사울로의 내적 체험을 이야기 형태를 빌려 설명한다. 성령이 내릴 때 믿는 이들은 바람소리를 듣고 혀 모양의 불을 보았다.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근처 길가에서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빛에 휩싸인 채 자신을 부르는 소리와 자신을 꾸짖고 자신에게 명령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 같은 현시는 구약성서에서 모세가 체험한 신현에 등장한다. 특히 2마가 3,7-34에 나오는 헬리오도로스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그는 성전을 약탈하러 들어갔다가 말을 타고 나타난 기사에게 압도당하여 몸을 전혀 가눌 수 없게 되며, 대사제 오니아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성전을 수호하는 사람이 된다. 바오로의 경우는 더 극적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름난 박해자였다가 주님 자신을 만나 뵙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땅 끝까지 증언하는 선교 대열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1

아직도라는 말로써 루카는 사울로의 회심에 관한 이 이야기를 8,1-3에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이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사울로가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병히 밝힌다. 사울로가 대제관에게 가서 요청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해 줄 편지였다. 루카는 예수 또는 예수 운동을 파괴하려는 유다교 지도층의 노력을 끊임없이 보고한다.

 

2

루카는 다마스커스에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갈릴래아 선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대제관들이 이같은 소환장을 발부할 권한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구약성서에서 은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은유다. 이같은 의미는 신약성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루카는 이 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한다.

 

3

빛의 출현은 하느님의 현존과 연결된다. 빛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신현(神現)을 가리킨다.

 

4

빛에서 나오는 소리는 출애 3.4의 가시덤불에서 나오는 소리와 출애 19,16-20의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들은 소리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분명히 생존해 계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예는 루카 8.24; 10.41; 22.31에서도 발견된다.

 

5

바오로는 신현만을 인정할 뿐이지 아직 주님이 예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현시 안에서의 대화는 독자로 하여금 현시의 메시지를 더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지닌다.

 

어떤 사본들에는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되어 있다. 예수라는 본명을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대로 사용한 점에 유의할 것. 새로운 형태로 더 큰 권능을 지닌 채 살아 계시는 분, 그리고 그분의 추종자들과 동일시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 자신이시다. 바오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6

이야기의 중심요소는 예수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바오로에게 부여된 소명이다. 그리스도인 박해에 위세를 펼쳤던 바오로가 이제는 무력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힘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그 힘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7

이 사건을 다룬 세 기록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바오로의 동행자들이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33.9에서는 동행자들이 빛을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한편 26.14에서는 모두 함께 엎어지나, 이 대목과 22.7에서는 바오로만 엎어진다.

 

9

3일 동안 장님이 된 것은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천상 빛을 육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일 동안의 단식은 소명을 맏기 전의 준비를 가리키거나 내적인 참회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단식은 계시를 받기 전의 준비기간과 연결되거나 참회와 연결된다.

 

10

10-16절에는 새 장면이 소개되는데, 주인공은 그리스도와 아나니아이다. 이 구절에서 아나니아에게 붙여진 제자칭호는 그가 그리스도인임을 가리킨다. 그는 13절에서 암시하듯 다마스커스에 정착한 히브리인이다. 아나니아의 대답은 순종의 표시로서 사무엘의 대답과 비교된다. 그러나 하느님을 처음에 잘 몰라본 사무엘과는 달리 아나니아는 주께서 부르실 때 즉시 알아본다. 22.12에서 바오로는 아나니아를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현시를 통한 계시는 루카가 즐겨 쓰는 문학 기법이다.

 

11

바른 길유다의 집등 구체적 묘사는 이 대목이 실제사료에 바탕했다는 추측을 낳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저자가 유능한 이야기꾼임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도와 단식은 흔히 함께 연결된 신심행위다.

 

13

아나니아의 주저함은 이해가 가지만 주님의 명령은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는다.

 

15

발로의 선교활동을 요약한 청사진이 여기 제세된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 아그리빠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로마 황제 앞에서도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바오로는 계속하여 동료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다.

 

16

고난을 받아야 한다라는 표현은 바오로를 예수나 모세와 같은 수난하는 예언자들의 반열에 직접으로 들게 한다. 바오로의 행적을 언제나 성공적으로 묘사하는 루카가 그의 수난을 처음부터 예고한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17

여기서는 안수가 치유를 가져오고 성령을 내려주는 일에 연결된다. 아나니아가 안수를 하며 바오로를 형제로 부르는 것은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18

비늘 같은 것들은 그리스어 부사 “...와 같은이 덧붙여졌기 때문에 실제적인 현상을 가리키기보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 장님이었던 바오로가 이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오로의 눈을 멀게 했던 빛은 이제 역설적으로 영적인 장님 상태에서 그를 구해 주었다.

 

19

바오로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음식을 먹음으로써 다시 정상적인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다.

 

20

바오로는 즉시 유다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루카는 바오로가 언제나 회당에서 설교하기 시작하고 거기서 쫓겨났을 때만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고 전한다. 바오로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소명을 받은 후 아라비아로 건너갔다가 나중에 다마스커스로 돌아왔다. 바오로가 예수께 대해 선포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칭호는 사도행전에서 이곳에만 직접 언급된다.

 

21

다마스커스 신도들의 반응은 13절의 아나니아의 반응과 같다. 바오로는 스스로 이들의 반응을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자신이 그 때 부수어 없애려던 신앙을 도리어 널리 전하고 있다”(갈라 1.24).

 

22

바오로는 예수의 메시아 신분을 밝히는 데 더욱 신명을 냄으로써 회당에 있는 유다인들로 하여금 그를 살해할 음모를 꾸밀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15

루카 24.47; 사도 1.8; 참조; 마태 28.19, 복음의 골자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16

복음선포에 대한 반응은 믿음 아니면 불신이다. 믿음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결단이다. 이 결단을 내린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것을 뜻하는 상징적 행위 곧 세례를 수락하게 마련이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종말에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멸망할 것이다. 요한 3,3.18에도 믿음과 세례와 구원의 상관관계가 드러난다.

 

17

17-18절에서는 신앙인들에게 다섯 가지 기적적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네 가지는 사도행전에서 따온 것 같다. 구마이적, 언어이적, 독사이적, 치유이적, 음독이적만은 신약성서 밖의 구전에서 따온 것이다. 가이사리아 주교 에우세비우스는 유스투스 바르사바스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치명적인 독을 마셨지만 주님의 은혜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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