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전환점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29 조회수517 추천수5 반대(0) 신고
 
 
 
 
 


<전환점> ... 윤경재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3-20)



  이 대목은 제가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왜 그랬을까? 하고 의문이 들었던 대목입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은 이방지역이었습니다. 왜 굳이 이방 지역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신원을 알려 주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 직접 그곳을 방문하고 나서 그 의문점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북쪽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은 요사이 바니아스라고 부르는 지역입니다. 바니아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파니아스입니다. 판神의 도시라는 뜻인데 판神은 목동의 신입니다. 셈족이 ‘ㅍ’ 발음을 잘 못해서 ‘ㅂ’ 발음으로 내기에 바니아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바니아스 지역은 헤르몬 산자락으로 그곳에서 샘물이 솟아나 요르단 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시발점이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샘물이 솟는 장소에 큰 신전을 지었고 여러 신을 모신 큰 사당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을 시작으로 큰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그 도시를 카이사리아 필리피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여러 신을 모신 장소에 오셔서 당신이 어떤 존재이신지 알려 주신 것입니다. 공생활 중에 이미 여러 가지 기적과 질병치료 또 표징을 보여주셨기에 평범한 분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존재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셨기에 알쏭달쏭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적당한 기회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을 분명히 가리켜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성한 곳이라고 여기는 곳을 택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신보다 더 월등히 뛰어난 한 분뿐인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굳이 신들의 도시인 바니아스까지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직접 언술하시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도록 유도하십니다. 그것도 남의 생각을 빌려와 그렇다더라 하는 식의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판단과 의견을 솔직하게 드러내라고 요청하십니다. 바로 분명한 자각과 판단으로 행동에 옮기라는 요구입니다. 그래서 치유와 기적을 베푸실 때도 무작정 베푸시지 않고 먼저 당사자에게 어떤 질문을 하여 합당한 자세를 갖추도록 유도하십니다.


  마치 욥기에서 욥이 하느님께 그동안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고통받는 것에 항의하다가 마지막에 와서 자기가 진정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백하며 말하는 대목과 비슷합니다. “당신에 대하여 소문으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5-6) 욥의 잘못은 하느님을 간접으로만 알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욥의 참회는 하느님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나왔습니다. 바로 자신이 겪은 고통의 삶이 하느님을 깨닫는 과정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살아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모든 것에 감사하다는 참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에게 상황 판단하도록 하시고 자신의 생각을 발설하도록 하십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라는 요구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쩌면 당연하게  고백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상상 못 할 대답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마 베드로도 이전까지 긴가민가하는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지은 신들의 도시에 와 보니 비록 겉모습은 화려하고 굉장하지만, 죽어 있고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살아계시고 전능한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깨닫습니다. 여태까지 곁에서 지켜본 이분이야말로 진정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 대답이 옳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네 살과 피가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더 분명하게 밝혀주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언급하십니다. 침묵을 요청하십니다. 떠벌이지 말고 실제적인 결실이 맺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의 변형입니다.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설익은 채 드러나서는 안 되기에 침묵을 요청하십니다. 그 변형과 탄생은 실제적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수난과 희생입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 사건 이후에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시는데 바로 ‘거룩한 변모 사건’입니다. 이렇게 이방 제신(諸神)을 섬기는 장소에서 그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당신의 신원을 밝히시고, 또 수난을 예고하시고 변모하는 모습을 보이시는 일련의 사건이 바로 예수님 공생활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복음서 내용은 긴박하게 전개됩니다. 갈등과 클라이맥스를 향해 줄달음칩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렇게 자신의 결단으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식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몸으로 체득하고 나서 자신의 십자가를 찾아 나서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 터닝 포인트 즉 전환점이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고백하는 진정한 모습일 것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