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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17 조회수594 추천수5 반대(0) 신고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마태 11,28-30) 
-유광수 신부 -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단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한 분도 안 계실 것이다. 한결같이 우리 모두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럼 언제부터 왜 이렇게 인간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기 시작하였는가?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죄를 지어 에덴동산을 떠나면서부터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가 바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습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인간을 구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곧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시다.

 

"구원하다." 라는 말은 라틴어로 Salvare라고 하는데 이 말은 " 구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 생명을 구하다, 구제하다, 위험으로부터 지키다. 보호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인간을 구조한다, 구출한다, 해방시킨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고통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나를 구해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가.

 

우리 모두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는데 누가 우리를 이런 고통에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가? 구해 줄 수 있는가? 대통령이 할 수 있는가? 학교 선생님이 구해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부모님이 구출해 낼 수 있는가?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내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거운 짐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고 고통에서 나를 건져 줄 수 있는 분은 단 한분 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내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해 줄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의 이 초대에 응해야 한다. 이 초대는 바로 나를 위한 초대요, 나에게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초대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대이기 때문에 이 초대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사실 우리 모두의 간절한 원의는 바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이런 원의가 있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우리는 일하고 공부하고 있다. 고생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간절한 원의는 있으면서도 어디에서 어떻게 하면 이 고통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거기에서 헤메이고 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것은 허무요, 무기력함이요, 절망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은 참으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는 복음이다.


조용히 이 말씀을 음미해보자. 누가 우리에게 이런 초대를 하겠는가? 나의 아버지가 아니면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우리들에게 구원은 무엇인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벗어버리는 것이다. 오늘 나의 구원은 그동안 나를 얽메어 놓고 있는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구원은 무엇인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원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만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누려야 한다. 예수님이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받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생과 무거운 짐은 우리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벗어버리고 해방되어야 한다.

 

정녕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받는 은혜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이런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간단하다. 즉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기 위한 방법이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제시되었다. 먼저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대로 배워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께 가기는 하면서 그 다음에 배우는 일을 소홀히 한다. 그냥 에수님께 가서 청하기만하면 되는 줄 안다. 물론 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을 수 있는지 모른다. 그 방법을 모른다. 

 

~ 집회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아, 나에게로 와서 내 학교에 들어오라. 어찌하여 지혜를 갖지 못한 채 불평만 하고 너희 영혼의 갈증을 풀 생각을 하지 않느냐! 나 이제 결론삼아 말한다. 지혜를 돈으로 살 생각은 말아라. 네 목에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라. 지혜는 바로 네 곁에 있다. 눈을 바로 뜨고 보아라. 내가 얼마나 적은 노력으로 큰 평화를 얻었는가를!"(집회 51, 23-27)

 

내가 아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어떤 강의를 하든 어떻게 알고 나타나시는지 그 자리에 반드시 와 계신다. 이 할머니와의 인연은 99년도 마르코 복음 강의를 사당동에서 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부터 이 할머니는 내가 어디에서 강의를 하든 줄기차게 쫓아다니신다. 지난번 논현동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남보다 항상 일찍 오시는데 하루는 저에게 다가 오셔서 "신부님, 저는 요즈음 생기가 납니다. 이 노인네가 생기가 나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다  신부님 덕분이예요. 신부님의 강의를 통해서 복음에 눈을 뜨니가 모든 것이 신비롭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어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할머니가 편안하게 지낼 형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 할머니는 소대변을 다 받아내야 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계신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할아버지 병 간호를 해야 하는 어려운 형편에서 생활하신다. 그런 형편이지만 그것을 고생이라거나 아니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하고 가벼운 짐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예수님한테 그 멍에를 메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고 음미해보자. 감사로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참된 음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참된 아버지로 알고 우리는 그분의 참된 자녀라는 것을 올바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사는 법을 배우고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참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늘 우리를 당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행은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그 재산을 갖고 아버지를 떠나 멀리 다른 지방으로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마침내 거지가 되어 온갖 고생과 굶주림을 겪고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할만큼 아버지 아들의 자격을 상실하여 마치 돼지처럼 살아가는 비참한 모습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항상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듯이 오늘도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애타게 기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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