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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6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독서, 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6-25 조회수1,486 추천수1 반대(0) 신고

한국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29)이나 이날과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한다. 이 교황 주일에는 교황의 사목 활동을 돕고자 특별 헌금을 한다.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어 거룩한 신비를 거행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 하느님께서 사랑의 힘과 부드러움을 더해 주시어,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형제들을 섬기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또한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기억하는 축일을 앞두고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1독서

<엘리사는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섰다.>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9,16.19-21
그 무렵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19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20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뒤를 이를 예언자로 세우라고 하신다.

 

 

 

 

 

 

 

 

 

2독서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5,1.13-18
형제 여러분,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13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15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한다면,
서로가 파멸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16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18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

5장은 앞부분과 연결하는 문장이나 접속사 없이 갑자기 시작한다. 다만, “자유라는 말을 4.31자유인이라는 말에 착안하여 선택한 듯하다. “자유를 위해라는 말을 문장의 맨 앞에 놓아 강조함으로써 편지의 교의적 메시지를 요약한다. , 자유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사업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자유는 율법의 종살이로부터의 자유요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다.

 

 

13

이 말은 자유라는 말을 매개로 1ㄱ절과 연결된다. 1절에는 자유롭게 하다라는 동사가 3인칭 단수형으로 사용됨으로써 그것이 그리스도의 행위임을 강조하고, 여기서 부름받다라는 표현은 신학적 수동태로서 주어가 하느님이심을 암시한다. “자유는 갈라디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목적이며, 율법과 죄와 이 세상 원소들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말한다.

 

원문에서는 동사가 생략되어 있는데“(구절로) 삼다”. “(기회로) 행사하다라는 말로 상정할 수 있다. “기회혹은 구실로 번역되는 말은 원래 군사용어로서 작전지점. 기지를 의미했지만, 여기서는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어떠한 기회를 주어서도 안되는 적은 이다. 앞에서는 이 말이 주로 인간이나 신체를 지칭했다. 그러나 여기거부터 6.8까지 은 전적으로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과 대조되는 인류의 현재 조건을 암시하며, 아마도 가장 타당한 의미는 타락한 혹은 죄많은 본성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육체가 본성적으로 약하다는 사상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직역하면 서로 종노릇하시오”. 그리스도교적 자유가 서로의 종이 되기 위함이라는 것은 역설이다. 그러나 이 종노릇은 우리를 위해 종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으로서 부활한 그분의 자유에 동참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교의 자유는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는 데서 실현된다.

 

14

모든 율법은 개별 규정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율법, 혹은 정신을 가리킨다.

 

이 문장은 14절의 주장에 대한 이유문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앞에서 율법이 의화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한정적 역할만 했다고 주장한 바오로가 여기서 갑자기 율법의 성취를 언급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학자들은 바오로가 율법의 성취와 율법의 준수를 구별함에 주목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취이자 준수는 아니라고 한다.

 

문맥상으로도 그리스도교적 자유가 사랑을 통해 서로 섬기는 데 있음을 논증하기 위해 레위 19.18을 인용하므로 여기서 핵심 논지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실존을 나타내는 이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윤리적 생활을 촉구하며, 그 사랑의 결과로 모세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게 한다.

 

15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다는 사나운 짐승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서 14절의 상호간 사랑과 대조된다. 구문상 가정법이 아니라 직설법 조건문 형태이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당시 갈라디아인들의 상황을 표현한다고 보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문학상 표현일 뿐이라고 보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문학상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실제상황이라해도 싸움의 구체적 동기나 목적에 대해서는 추측이나 할 수 있을 뿐이다.

 

16

거닐다의 그리스어 페리파테오는 히브리어 할라크(“사가”,“옮아다니다)의 번역으로서, 상징적으로는 종교적 모역적 생활양식을 서술하는 데
쓰인다. 현재형인 것은 과거에 행하던 것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영을 따라라는 표현의 여격은 기원과 도구성을 모두 의미하며, 따라서 율법주의나 자유방임과는 다른 생활양식을 지칭한다. 하느님의 아들 자격을 얻게 하는 성령이 그리스도인 행동의 원칙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 속에서 싱령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신앙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17

육과 영의 대조를 교차대구 형태로 강조한다. 육은 하느님을 거절하는 자들의 생활원칙을, 영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생활원칙을 가능케 하는 초월적인 힘이다.

 

직역하면 이것들을 서로 적대합니다영과 육을 이것들이라는 중성 대명사 복수로 표현함으로써 인격적 힘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실재처럼 다룬다. 또한 적대하다라는 현재형 동사는 그 적대, 대조가 지속적임을 나타낸다.

 

은 완전히 대치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사람이 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일치되고 성령을 받아도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에 대항해야 한다. 이는 율법과 죄의 법과 하느님의 법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 인간의 상황에 관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생각이 로마 7,15-23에서도 발견된다.

 

18

현재 수동태로 쓰인 영에 인도된다는 실제적으로 16절의 영을 따라 거닐다와 동일한 뜻이며,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인도하는 영에 자발적으로 종속시킴을 의미한다. 이렇게 영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은 을 이기는 내적 원칙을 갖게 되고, 더는 율벅의 형식적 규율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율법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1-62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57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51

맞아들여질 날은 직역하면 맞아들임의 날들이다. 이는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때를 가리킬 것이다. 9,31떠나심과 같은 뜻이겠다. 그런데 맞아들이다동사가 예수 승천을 가리키는 사실로 미루어 맞아들여질 날은 주로 승천의 때를 가리키겠다.

표정은 원문에서는 얼굴

 

52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루카 특수사료. 사마리아인들은 누구인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북부왕조 이스라엘을 패망시킨 다음부터 이스라엘인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생긴 혼혈족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연히 야훼신앙을 변절시켜 일종의 혼합교를 신봉하고 가리짐 산에 성전을 세웠다. 따라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사이가 몹시 나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을 냉대하지 않았다. 또한 교회도 일찍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전도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57

9,57-62에는 소명과 추종에 관한 상황어 세 편이 수록되어 있다. 첫째와 둘째 상황어는 마태오에도 있는데, 이 둘은 어록에서 옮긴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샛째 상황어는 마태오에 없다. 루카는 이 상황어를 구전에서 채집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록에서 따왔을 개연성이 더 크다. 그 까닭인즉 마지막 상황어와 첫째 상황어의 구조가 똑같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추종을 자칭하는 무명 인물에게 절처한 요구를 하신다.

 

끝으로 마르코복음과 어룩의 소명사화 사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마르코 복음에는 소명을 받은 사람의 이름과 신분, 소명을 받은 장소와 시기, 소명에 대한 추종여부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어록에는 이런 요소들이 없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일체의 안일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요구만이 있다.

 

첫째 상황어에서는 이스라엘 각지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시던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같은 생활을 요구하신다. 우리나라 방랑시인 김립도 58절과 흡사한 말로 신세를 한탄한 적이 있다 한다. “새는 보금자리에, 짐승은 굴에 모두 거처할 데가 있으되, 나는 돌아보매 한평생 홀로 슬퍼하고 있도다

 

59

당대 유다인들이 정례를 무척 중요시한 사실을 보면 둘째 상황어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이레적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자기 앞에 시신을 모신 때에는 셔마를 외우는 일과 기도와 기타 기도들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후대에는 여기에다 율법에 명시된 모든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유다교 일각에서는 장례를 선행의 극치로 여겼다. 남달리 정결례를 지켜야 했던 까닭에 원칙적으로 문상 가는 일이 없던 세관들조차 자기 부모

 

동기, 자식의 장례만은 손수 치러야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이 우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려는 것조차 허락지 않으셨다. 그 옛날 하느님이 예언자들에게 사회규범을 파기하도록 명하신 고사를 연상케 한다. 하느님이. 상처한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곡하지도 말고 상례를 갖추지도 말라고 하셨는가 하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는 결혼하지도 말고 향연에 참석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60

당신은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시오라는 말씀에는 예수께서 인륜 대사인 부친 장례까지 금하신 이유가 드러난다. 그보다 더 고차원적 가치인 하느님의 나라를 선전하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의 충격을 받아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생활을 지속하지 않는다고 하신 단절어를 연상케 된다: “하늘나라 때문에 자신을 고자로 만든 고자들도 있습니다”(마태 19.12).

 

61

셋째 상황어에서는 예수께서 추종자에게 식구들과 작별할 겨를조차 주시지 않는다. 엘리야가 식구들과 작별할 겨를조차 주시지 않는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제자로 삼은 고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엘리야가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를 제자로 삼으려 하자 엘리사는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한 다음에 따라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하니 엘리야는 기꺼이 어서 가보게. 내가 어찌 작별인사를 금하겠는가하고 허락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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