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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순한 영혼이 실행할 수 있다 - 목요일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25 조회수632 추천수2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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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 아니겠지요. 실행하지 않아도 들어 가겠지요.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 아니겠지요. 실행하지 않는다고 어리석은 사람인 것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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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세계에서 바위는 견고함을 상징하고 보호와 안전 등을 제공한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바위는 고정적인 것, 변하지 않는 것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의 표상이기도 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위의 이미지들은 사막이 그 배경이 된다. 바위는 하느님을 상징한다. "그의 활은 든든히 버티고 그의 손과 팔은 날쌔었다. 이는 야곱의 장사의 손, 이스라엘의 목자요 바위이신 분의 이름 덕분이다" (창세 49,24). 신약에서 바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1코린 10,4). 예수님이 사도 베드로를 반석에 비유한데서 바위의 상징이 중요하게 나타난다. 초대교회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을 바위 (반석) 위에 지은 집에 비유하기도 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를 상징한다고 했다. 중세 초기 미술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어린 양이 서있는 바위에서 샘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자주 그렸다. <자료 출처 : 굿뉴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것과 같다. 먼저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 참으로 하나만을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고보면 실행해야 하는 아버지의 뜻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기도 하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의 마음이다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마음이 자신의 뜻인 것처럼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의 마음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의 말(글)을 보면 알게 되는데 아버지의 마음은 아버지의 말씀에서 알 수 있게 된다. 사람은 하느님을 사유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이신 당신의 말씀에 대해서는 관상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의 한계적인 언어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불확실성의 삶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적이지 못하면 말씀에 내재된 아버지의 뜻(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오는 온갖 지식에서 말하는 것들과 성령의 지도(인도)로 그리스도의 말씀(그리스도의 마음)을 깨닫는 것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세상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식적으로 말씀을 아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평가에 급급하며 자신의 뜻에 연연하지만 성령적으로 말씀을 깨닫는 이들은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포기할 줄 알게 된다.

자기 집을 짓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시고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바탕이 아니시다는 의미이다.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짓는다 함은 자기 위에 짓는 것이며,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짓는다 함은 그리스도 위(바탕)에 짓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버릴 줄 모르면 자기 자신이 바탕이 되는 것이다. 교만한 영혼의 소유자는 언제나 그리스도 보다는 자기 자신이 기준의 척도가 된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을 깨달았다면 다음은 이 생명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실행의 문제에 접하면 사람들은 누구나가 '나약한 인간성'을 앞세운다. 좀처럼 실행이라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을 때가 많은 까닭이다. 힘들기 때문이다. 고난과 시련, 슬픔과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세상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로 말미암아 하나같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육신은 영혼을 결박한다. 육신적인 문제는 마음을 어둡게 하고 무력하게 만든다. 영혼이 육신의 결박에서 풀어지면 세상의 차원을 초월하는 하늘의 차원으로써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 영혼을 가리켜 복된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복된 영혼'은 육신의 감옥에서 해방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머리만으로는 인식될 수 없는 하늘나라의 차원인 것이다.

하느님 '현존 체험'은 인간의 정신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현실의 실제적인 실행에서 감지되어 지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실로 불경스럽기까지 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느님을 사유한다는 것은 실행하지 않고 지식적으로만 머리의 함량을 늘리는 것에 불과하다. '체험'은 가슴으로 느끼며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고 '사유'는 머리로 몽상하며 생각으로 허상 속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일이 심하면 (거짓 계시의 현상들에 집착되어 환상에 빠지면) 거짓의 노예가 되어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자기 육신은 영혼을 묻어 두는 무덤이 되는 것이다. 이 무덤에서 우리를 살려 내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주님의 살과 피로 인간 육신을 열어 주셨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는 "생명과 영이 있으시다" 하지만 말씀을 실행할 때에 무덤을 열고 생명으로 변화되어 지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말씀에 생명과 영이 있다면 말씀으로 하여금 실행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져 있다. '생명의 영'이 죽었다면 말씀에는 실행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없을 테이지만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넣어 주신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 당신께서 행하시고 우리 의지에 그리스도의 힘을 더하여 불어 주시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느님을 더욱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은 자기 안에 말씀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체이시다. 주님의 성체는 그리스도의 당신의 현존이시며 말씀의 실행이다. 성체는 육신을 여시어 피를 흘려 주신 것이다. 따라서 말씀의 실행에는 그리스도적인 '고난의 잔'이 언제나 자기에게 내려지는 것이다. 고난보다 안락에 맛들인 영혼은 결코 실행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체계(방어 무장)를 구축하여 실행에서 피하고자 할 것이다. 이같은 자기 집은 모래에 짓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체계' 위에 자기 집을 세상의 안락보다 사랑의 고난으로 성심껏 짓는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의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주신다. 아버지의 뜻은 복잡하지 않으며 단순해 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단순해 진다는 것은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하면 알 수 있게 되는 아버지의 마음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찌 어린아이로 되돌아 갈 수 있으며 어린아이처럼 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면 체험에서 아버지의 뜻이 단순해 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어린 순결한 마음 상태에서 아버지를 뵙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말씀, 성체)를 따르면 영적인 말씀을 분별할 수 있게 그 영혼이 차츰 단순해 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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