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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화의 계보/영적성장을 위한 감성수련 문종원신부님
작성자조연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08 조회수568 추천수4 반대(0) 신고




 

 

* 화의 계보 *
 

히브리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분노와 자비

모두를 지닌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둘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관계를 통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화를 내는 장면은 다음에서 나타납니다.

“야훼께서는 크게 화를 내시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적에게 침략을 받아

노략질을 당하게 하셨다. 또한 둘러싸고 있는 원수들 손에 팔아 넘기셨으므로

그들은 도저히 원수들과 맞설 수가 없었다”(판관 2,14).

예언자 예레미아는 하느님을

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지닌 분으로 묘사합니다.

“나의 결정이 국가를 모으는 것이고 왕국들을 닮게 하는 것이고,

나의 영을 그들에게 부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끌어 오르는 화가 나의 열망의 화 안에서

모든 지구상에 보여진 덕이다”(예레 3,1-8).

 

 히브리 성서는 하느님의 분노를 그가 바로

그 백성들의 변덕스런 행동으로 인해 초래된 하나의 응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분노는 자비와 균형을 이룹니다.

* “나의 자비는 온유하고 부드럽다.

나는 나의 화를 지속하지 않을 것이다”(호세 11,8).

 “야훼는 부드럽고 자비하시니, 천천히 화내시고, 사랑이 지극하시며,

하느님의 화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시편 103).

흔들리지 않는 신성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이 화를 내는 것만큼 많은 문제를 드러냅니다.

히브리 성서에서, “자비”와 “모태”는 동일한 뿌리를 지니며

이 감성은 다른 사람들의 슬픔 안에서 깊게 연결됩니다.

 

분노는 고대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특권적인 위치로 나타납니다.

예언자들은 자주 변덕스러운 이스라엘의 행동에 경고를 보내는

하나의 상징으로 화를 냈습니다.

실제적으로 화를 잘 내는 성격의 소유자인 예레미아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야훼의 분노를 표현합니다.

 * “나의 화와 저주가 이 장소에 퍼부을 것이다”(예레 7,20).

 * 그리고 그 자신의 마음에 스며든 성난 감성들을 표현합니다..-

“야훼의 노여움이 속에서 우글거려 저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예레 6,11).

 

유대 그리스천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은 종교적 공동체 안에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을 대변했습니다.

왕이나 사제들의 권위를 견제하며 예언자들은 정절, 정체,

그리고 변화에 대한 고통스런 질문들을 제기했습니다.

예언은 이스라엘 내에서 적절한 분노를 야기시켰습니다.

예언자들이 심하게 무시되거나 폭력에 의해서 침묵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들의 소명은 신앙의 선조들 사이에 있었던

명예로운 분노의 발생 장소에 대한 증거물을 제시했습니다.

분쟁과 갈등이 발생했을 때

그들은 계속적으로 살아 남을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이러한 장소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의 긴 계보 안에 있습니다.

비록 때때로 연민의 정으로 가득찬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예수님의 이미지를 보여 주면서도,

복음사가들은 예수를 종종 분노하는 분으로 회상합니다.

가장 적절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성전 입구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을 대할 때입니다.

그는 크게 분노하며 그들이 진열해 놓은 것들을 뒤엎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팔고 사고하는 사람들을

다 내 쫓아 내시고 환금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마태 21,12).

 * 복음사가들은 자주 예수가 위선자라고 판단한 사람들에 대해

격렬하게 화를 냈음을 강조합니다.(참조 루가6,42; 마태 6,16;7,5)

 *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한 여인을 치유하는 것이

당시의 엄격한 법률에 위배되는 것이라 비난 할 때,

예수님은 화를 내면서 응답합니다.

“일할 날이 일주일에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병을 고쳐 달라 하시오.

안식일에는 안됩니다”(루가 13,14). 라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이 위선자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이라 하여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 소 풀어내어 물을 억이지 안느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안식일 날 소와 당나귀에게

기꺼이 물을 주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냥 두는 것을 꾸짖으시는 장면입니다.

 

마르코 복음도 예수남깨서 안식일 날 치유한 것에 관해

비판하는 이들을 회상합니다.(마르 3:5)

종교적 율법에 관한 그들의 편협한 해석이 예수을 자극했습니다.

그는 화를 내며 그들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가슴속에 아픔을 지니고 슬퍼했숩나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모든 세 공관복음들-마태, 마르, 그리고 루가- 들은 공동의 원전을 가지고

이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화를 내는 부분을 언급함에 있어

이야기는 각기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세리 마태오는(12,12)은 예수의 화낸 표정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루가(6,10)는 ”화를 내며”라는 부사절 없이 “그는 그들을 돌아보며”라는

구절을 반복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제의 소지가 될만한 감정으로부터

예수님을 떼어놓으려는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만약 예수님께서 스스로 옳다고 하는 이들이나 위선자들 때문에 화가 났다면

-우리와 같이- 그는 또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화가 났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친근감 있는 화”에 대한 기억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죽기 전 바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면서,

그는 이것이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의식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염려스러우나 확신을 가지고 짠 여정들을

그가 신뢰한 가까운 제자들과 나눕니다.

그의 제자 베드로는 예루살렘 안에 적대적인 환경을 있음을 인식하고

그에게 가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그의 화를 폭발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방해하고 있다.”(마태 16,23)

친한 친구를 Harsh의 언어는 악마로서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화는 어려운 결정의 순간에 그가 얼마나 유약한 가를 잘 말해줍니다.

두려웠으나 결정했고, 베드로가 그에게 잘못된 조언을 제공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가 결정한 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의 친구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타오르는 분노는 결국 이 유혹을 거부하고

그 고통스러운 결정을 따르도록 그를 도왔습니다.

 

 하느님의 격노에 관한 증언, 예언자들의 분노의 증거, 화난 예수의 이미지

-이것들은 분노가 윤리적인 실패 이상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분노는 어떠한가?

유대인들과 크리스챤들에게 있어, 성서가 증언하는 것은

분노는 거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시편저자나 에페소인들에게 조언한

바오로의 조언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 목적은

“화를 내라,

그러나 죄는 짓지 말아라”(시편 4,4; 에페 4,26)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감성수련문종원베드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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