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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간음해서는 안된다'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13 조회수761 추천수4 반대(0) 신고
<간음해서는 안 된다.>(마태 5, 27-32)
-유광수 신부-

 

오늘도 어제에 이어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고 말씀하신 대로 두 번째 율법을 완성하는 내용의 말씀이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율법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남의 아내를 바라보는 눈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하였다."라는 말씀은 율법을 완성하시는 말씀이다. 율법과 복음과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율법은 '간음해서는 안 된다.'라고 행동을 취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라면 '음욕을 품고 남의 아내를 바라보는 눈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하였다.'는 복음은 행동만이 아니라 행동을 취하기 이전이라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고 있으면 안 된다는 내면의 상태에까지 지적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여인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근본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즉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 안 취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상태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즉 여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기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어떤 상품처럼 생각하는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비록 간음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면 그것은 간음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즉 여인에 대한 시각이 단지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여인의 위치는 사회적으로 매우 낮은 취급을 받았다. 심하게 말하면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남자들이 자기들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여인을 상품처럼 취급하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여인의 위치를 남자와 동등한 위치로 높여주시는 것이다.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혁신적인 일이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논리이다. 그러니까 여인을 남자들이 자기들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으로 행동하지도 말고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이다. 여인의 위치를 남자와 동등한 위치로 높여주심으로써 여인을 멸시하던 율법을 한 차원 높게 완성시켜 주신 말씀이다.

 

여인은 남자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는 동동한 인간으로서 서로 한 몸을 이룰 때 비로서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완성시켜주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창세 1, 26-28 참조) 하느님이 이렇게 인간을 만드신 후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었다.

 

그것은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 1,28)는 것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이러한 사명은 남자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해야한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의 예속물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그러한 목적으로 모든 것은 사용되어져야 한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잘 다스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데 사용되어져야 한다.

 

정당한 행위가 아닌 간음하는 행위는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위이다. 즉 간음하는 행위는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로서 창조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다. "네 오른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하는 말씀도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잘 다스려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창조의 목적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즉 목적에 맞지 않게 잘못 사용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이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코린10,31)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것이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여자를 간음하고 자기 신체의 일부분을 그런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삶이 아니다.

 

그럼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인가?    
예수님은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진복팔단을 가르쳐 주셨다. 즉 인간이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따라서 우리가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 의롭게 산다는 것은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하지 말고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복팔단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그것은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린 것이며, 등불을 켜서 등경 위가 아니라 함지 속에 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라는 것이다. 아무 쓸모가 없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삶이란 곧 살인을 하고 간음하는 행위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여인을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내 인생의 동반자라는 생각보다는 성적인 대상으로 마치 성을 돈으로 주고 사는 상품처럼 흐르고 있는 풍조가 생각보다 훨씬 넓게 번지고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보다는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보기 때문에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이혼이 이루워 지고 있다.

 

즉 삶의 모든 가치를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느냐 아니냐에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서로합심해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려고 하기보다는 쉽게 갈라서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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