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4월 20일 야곱의 우물- 요한 14, 1-12/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20 조회수454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요한 14,1-­12)
 
 
 
 
이 본문은 고별식(13­-17장)에 속하는 고별사(14-­16장)의 시작 부분입니다. 당신이 곧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게 되셨음을 분명하게 알리시면서 동시에 위로와 안심과 당부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난데없는 예수님의 고별 선언(33절)에 제자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베드로는 저승까지도 따라가겠다고 큰소리치지만 현실이 생각처럼 수월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1절) 침착하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임박한 이별을 앞두고 발표하신 새 계명(13,31-­35)을 실천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마음 다스리는 일이 첫째인가 봅니다. 혼란은 믿음에 방해가 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믿음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과의 이별은 잠시입니다. 제자들을 고독하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더욱 친밀하게 함께하실 것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성숙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라, 안심해라.’ 오로지 믿음으로만 예수님의 부재를 견뎌내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에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듯 그런 공간적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더라도 제자들과 함께 있겠다는 위로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곧 하느님과도 함께라는 뜻이겠지요. 아버지 곁에 있는 영원한 집에서 말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2절) 제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한결같이 성실하신 스승의 모습입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승리하신다는 예언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주 드문 재림에 관한 언급입니다.
 
예수님이 가실 곳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길의 목적지는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6절) 짤막하게 자신의 존재를 계시하십니다. “나는 문이다.”(10,9)와 같은 맥락입니다.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스스로 진리 자체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지만 스스로 생명 자체이십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예수님은 전권을 갖고 계십니다. 요한 공동체의 예수께 대한 넘치는 사랑과 존경의 신앙고백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7절) 예수님과 아버지가 불가분의 관계이듯 예수님과 제자들도 끈끈한 결속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분만이 아버지께 대한 지식의 원천이십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8절) 일찍이 모세도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탈출 33,18)라고 청한 적이 있습니다만, 주님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 필립보의 요청은 하느님을 뵙고 싶어하는 우리 모두의 바람을 대변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아주 깁니다(9-­14절).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9절)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갈망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곧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신비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10절)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를 뜻합니다. 보는 것 말고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이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십니다(10절).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빛납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유대와 친교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직 믿음만이 그 초대에 답하는 길입니다.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1절)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표정을 읽으신 듯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12절) 제자들에게 능력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일’일 것입니다. ‘더 큰 일’이란 예수님을 능가하는 일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펼칠 활발한 전도 활동과 풍성한 결실을 내다보셨겠지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3절) 믿음과 더불어 기도의 중요성을 또한 강조하십니다.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을 굳건한 믿음으로 무장시키시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13절) 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고 아울러 기도함으로써 더욱 굳건한 믿음에 이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절대적 일치를 믿고 청한다면 더 큰 예수님의 일,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이 계신 곳에 거처하고 있습니다. 토마스처럼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여(5절) 참된 삶에 이르는 길을 되묻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교에서 멀어질 수 없다는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신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