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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마라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15 조회수625 추천수1 반대(0) 신고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마라> ... 윤경재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9,36-10,8)



  마태오 복음서 구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례 받으신 후에 먼저 군중에게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를 뽑으십니다. 제자들은 수확할 것이 많아 뽑힌 일꾼들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그 제자들에게 선교 여행을 떠나라고 이야기하시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한 가지 헷갈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신 구절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라고 명령하는 구절이 연이어 나오면서 마치 이방 민족에게는 복음 선포를 하지 마라라고 하신 듯 들린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명령하셨을까하고 여러 가지로 추측하게 됩니다. 아마도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우선이니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에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어떤 분은 자기 주변 사람을 먼저 복음화하는 것이 시급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어딘가 억지스런 점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방지역에도 다니셨으며, 거기다가 백인대장이나 시로페니키아 여인 등 이방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들의 청을 들어 주신 내용이 나옵니다. 또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며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시는 장면이 엄연히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방민족을 차별하지 않았고, 그들도 복음 선포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지 않으셨다는 반론도 나오겠지만 그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점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과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이 어떤 구체적인 장소에 가지마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사는 모습이나 사마리아인들의 생활방식을 본받지 마라는 정신적 자세를 지적하신 것이라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은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문란하게 생활하였습니다. 또 사마리아 사람들은 북 이스라엘의 자손으로서 BC 721년경에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을 때 이민족과 혼혈족으로 형성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사마리아 오경을 지니고 있었으며 메시아가 자기 민족에게서 나오며 그리짐 산이 진정한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폐쇄된 사고로 자기들만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부활도 없다고 여겼으며 남쪽 유대인과는 서로 적대적 관계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금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들만의 세계를 형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방인의 삶과 편협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따라 살지 말고 이스라엘의 신실한 삶을 따라 살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도 단지 혈통과 지역적 의미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구원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백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제자의 면모를 살펴보면 우리는 일반 사람과 다른 안목을 지니신 그분의 뜻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옛 스승들은 제자를 뽑을 때 자신을 찾아 배우러오는 사람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필요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지식이나 부, 권력 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충직한 점을 높이 사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은 사람을 뽑으셨습니다. 어쩌면 죄 많은 사람들을 뽑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의 이름을 살펴보면 각양각색입니다. 히브리어 식 이름도 있고 아람어 식 이름도 있습니다. 그리스어 식 이름도 나옵니다. 세리 마태오 같은 상종 못할 부류의 죄인도 있고 독립운동가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다양하게 혼합된 부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다닐 수 있었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자주 다툼하고 질시하는 단체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함께 스승을 모시고 다녔습니다. 그들에게 공통된 점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따랐다는 점입니다. 인간적인 출세와 영화를 바라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구현을 바라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8-69) 바로 너희도 떠나겠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가 한 답변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어떤 자격이 있어서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부족하고 구원을 필요로 한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구원을 받은 사람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공짜로 내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오 저자는 루카 저자와 달리 선교여행에서 돌아와 기뻐하는 제자의 모습을 기술하지 않습니다. 즉 아직은 제자들이 선교여행을 떠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교육과 영적 성장을 통해 보다 확실하게 스스로 변화된 이후에 복음 선포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 선포는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하신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저자는 복음서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장엄하게 장식합니다. 복음 선포가 제자의 첫 번째 사명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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