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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또 다른 심판의 기준: 비유가 이해되는가?
작성자김글로리아7 쪽지 캡슐 작성일2022-07-20 조회수1,857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2년 다해 연중 제16주간 목요

 

 

 

 

<또 다른 심판의 기준: 비유가 이해되는가?>

 

 

 

 

복음: 마태오 13,10-17

 

 

 

 

     


LORENZETTI, Pietro 작, (1325)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비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곧 ‘심판’과 직결됨을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기준은 사랑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도 하나의 비유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좀비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좀비는 아버지와 딸처럼 보입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놀이기구를 태워줍니다. 딸이 놀이기구에서 떨어져 손뼈가 부러지자 아버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모습은 영락없는 좀비이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 좀비를 향해 총을 쏩니다. 아버지 좀비는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그러자 딸 좀비가 쓰러진 아버지 좀비 앞에 서서 아버지를 보호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비유입니다. 여러분이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라면 딸도 쏠 수 있습니까? 만약 쏠 수 있다면 여러분이 좀비입니다. 좀비는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타인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모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비록 좀비처럼 보이지만 아빠와 딸은 상대의 고통을 느낍니다. 대신 고통을 감내하려 합니다. 그런데도 딸까지 쏜다면 내가 사랑이 없는 좀비임이 드러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사랑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무시한다면 내가 좀비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말씀은 살려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라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도 비유입니다. 이 비유 말씀을 이해할 때 나도 어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가정을 꾸릴 수준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진짜 어머니를 찾기 위해 다리 밑을 찾아다닌다면 나는 영원히 그 가정의 일원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성경 말씀과 비유를 이해하지 못할까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사랑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형과 싸우는 금쪽이를 아빠가 말릴 때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치고받고 싸우게 놔두지, 그랬어!”

금쪽이는 분노로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소리 지릅니다. 

    “날 죽이려는 거잖아. 난 아들이 아니라는 거잖아. 말이 충격적인 게 아니라 뜻이 충격적인 거잖아.”

엄마는 황당해서 말합니다. 

    “야, 내가 너 죽이라고 했어?!”

 

 

    도대체 금쪽이는 왜 엄마 말을 비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걸까요? 엄마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금쪽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 심한 학대를 당하였는데 그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금쪽이는 30cm 자로 폭력을 당했고 어두운 작은 공간에 자주 감금당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금쪽이 형이 말해준 것이라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학교에서는 착한 아이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면 말려야지, 왜 보호해주지 않아? 그때도 그랬잖아? 난 자식 아니야?”

 

 

    그러나 부모도 금쪽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도 난리를 치니까 미운 마음이 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를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해줍니다. 아이는 그제야 부모가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람임을 느끼고 진짜 싸우다 죽으라고 한 말이 아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은 이해하게 합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와서 성체를 영했을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성경의 비유가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겼던 ‘금송아지’처럼 제가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당신 위해 다 포기하고 들어왔으니 당신도 나를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고 불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물 줄 테니 밭 갈라는 식으로 하느님을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는 성경을 상징으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들을 귀가 생겼다는 증거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사랑합니까? 비유가 이해됩니까? 아니면 곧이곧대로 문자대로만 해석합니까?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영적으로 해석이 되면 성경이 비유로 보입니다. 상징으로 보입니다. 상징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나에게 말씀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죽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비유가 이해됩니다. 저는 책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많이 높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을 더 사랑합시다. 그러면 성경의 비유가 이해될 것입니다.

 

 

 https://youtu.be/sPSV5pPJNq4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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