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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칼날같은 혀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24 조회수608 추천수8 반대(0) 신고
 
 
 
 

 


1독서: 이사 49,1-6
2독서: 사도 13,22-26
복음:  루카1,57-66.80

이사야 예언자는 말한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을 헤집어놓고
뾰족한 화살촉처럼 콕콕 찌르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은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어, 
남들의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준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사람들이 항상 긍정적이고 건전한
비판자의 역할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불평하고 비난하는 
부정적인 성향의 사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사람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도 양면성이 있다.
즉, 자신이 그 사람의 칼날 밑에 있지 않을 때는 
시원하고 용감한 사람이라 박수를 치지만,
자신이 그 사람의 화살의 과녁이 되었을 때는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부정적인 사람으로 쉽게 낙인찍어 버리곤 한다. 


자, 그렇다면 누구의 판단이 올바른가?
도대체 어떻게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그가 하느님의 종임을,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참된 예언자임을 구분할 수 있을까? 


..................



볼노오의 ‘진리의 양면성’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진리는 자신을 숨기려는 “은폐성”도 있지만 
자신을 폭로하고 싶어 하는 "탈가면성"도 동시에 갖고있다.

그래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것들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샅샅이 탐구하고 증명하여 
마침내 진리로 수용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즉 은폐된 진리를 낱낱이 밝혀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정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
외면적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이면의 어떤 것을 꿰뚫어 보고자 하는 탐구적 경향이 
유난히 강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때일지라도 그가 단지 가면을 벗기는 것에만 기쁨을 느낀다면,
폭로하는 것 자체에 잔인한 희열을 느낀다면 
그것은 ‘비진리’에서 오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성령이 아닌 악령에 의한 태도라는 것이다.

진리의 편에 속하는 것같은 '예언자'도 마찬가지다.

쉬운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비판할 때에,
다른 사람이 모르는 그들의 위선적이고 나약한 일면을 
발견하고 폭로하는 자체에 짜릿한 희열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열을 조장하는 시기와 이기심에서 나온 것,
곧, 악령이 시키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래서 참 예언자가 있고, 거짓 예언자가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나 교구나 수도원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피력하는 것을 많이 보고 듣는다.

자신이 속한 곳이라고
무조건 박수치고 쫓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위험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습관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신과는 무관한 집단처럼 거리를 두고
비난이나 비웃음, 비아냥 일색일 때
과연 그가 진정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하는 말인지
그 비판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책임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
자신도 그 비판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인식하는 사람. 
진정으로 잘못된 현실을 아파하는 사람.
현실적 대안을 모색하며 고심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하는 비판이 예언자적 비판이고
그러한 비판이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건전한 비판이 아닐까 싶다.

구약에 나오는 모든 참된 예언자들은 
진정으로 동족을 사랑하는 깊은 회환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내걸고, 하느님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그 비판이 당사자 앞에서 하는 비판이냐 아니냐도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를 구별하는 식별기준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듣기 싫은 말이라도, 그의 앞에서 들려주는 말이라면
말하는 자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보다는
우선 뼈아픈 자기반성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당사자 앞에서 그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들려준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를 영영 잃어버릴지 모를, 
어쩌면 가장 철저한 반대자를 만들 각오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그 안에 곡해와 과장이 있다손치더라도 
그 진정성은 의심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곡해 마저 그 자리에서 풀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그러나 해당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이런저런 비판과 비난을 하는 것은 진리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다.
아무리 염려와 걱정의 차원에서 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진정으로 염려하는 걱정의 마음이었면 
무엇보다 먼저 그 사람에게 직접 했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 당사자에게는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뒤에서 치는 격이기 때문에 걱정의 가면을 쓴 폭로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예언자들도 그 당사자들을 직접 찾아가 
죽기를 각오하고 쓴소리를 전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는 왕에게 말이다.
그래서 이것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름하는 잣대가 된다는 것이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따라서 이런 칭찬은 자신의 사욕을 떠난 참 예언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



오늘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기리는 축일이다.
세례자 요한도 자신의 온 삶을 내놓고 왕의 회개와 사람들의 회개를 거침없이 외쳤다.

오늘 복음은 요한에 앞서서 그의 아버지 즈가리야가 먼저,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된 사실을 전해준다.

그에게는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복음을 믿지않은 자신의 불신을 반성하고, 
구세사의 모든 의미를 찬미가로 토해낼 때까지 
열달 동안의 벙어리 냉가슴의 정화기간이 꼭 필요했었을 것이다.

이는 진실로 자신의 부족함, 불신, 나약함들을 먼저 깊이있게 성찰하고 나서야,
다른 이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진정 이해하고 독려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때에야 비로소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바른 말,
즉 상대의 모습을 개선해줄 수있는 예언자적 제안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


살다보니, 나 하나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남에게 건방진 소리를 할 때도 많았다. 
반대로 자기 눈의 들보를 두고서, 내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덤벼드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그 모두가 자신을 모르고 상대방만 고치려했던 무리한 말과 행동으로,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남기고 두고두고 회한을 남겼다.

어떻든 칼날같은 혀를 휘두르기 전에
벙어리 냉가슴의 오랜 침묵도 반드시 필요한 일인 것 같다.
비판이 비난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도
자기 비판의 근원이 진리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면밀하게 따져봐야 할 것 같다.








      Flute: R. Carlos Nakai / Piano: Peter K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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