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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도와 용서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22 조회수637 추천수9 반대(0) 신고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깊은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예물을 바치는 행위는 기도를 의미하고 형제와 화해하는 것은 용서를 의미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은 교회를 상징한다.
교회는 교회지도자나 대표자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단 두 명의 신자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작은 교회가 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은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룬 소중한 열매다.
그전까지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그 위계질서를 이루는 것이 교회라고 인식하던 것이,
공의회를 통해 비로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교회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라는 위계질서가 아닌,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동참하여 하느님백성을 구성한다.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 한국교회는 그런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성직자가 위계질서의 최고의 위치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상명하달식으로 움직여지고 있다.
평신도 스스로도 모든 것을 성직자에게 일임하고
자기 스스로는 교회의 일에 주체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다.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로 발길을 옮기지 않는 이유는
교회 안에 그들을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아이 취급하며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는 역할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단 두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뒷 부분 말씀에 관계된다.
서로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말씀 속에는
용납, 받아들임, 수용, 인정, 이해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가 있다.
나에게 잘못해야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또 나에게 잘못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용서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문을 열고 대화하는 것도 용서하는 것에 해당된다.
용서는 미래에 또 다시 용서를 구할 부분에 대해서도 열려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고 하나의 결점은 신체적인 장애처럼
늘 같은 잘못으로 사람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흔 일곱 번, 혹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우리도 고백성사 때마다 매 번 같은 잘못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는가?
“며느리가 밉습니다. 남편이 보기 싫어요. 욕했어요. 등등”
늘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을 시기, 질투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때마다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한 번만 받아들이고, 이번 만 이해해주고, 오늘만 용서해주는 것으로는 용서가 이루어질 수 없다.
무한한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여러 번 나왔다.
돌아온 탕자에 대한 비유, 일만 탈란트를 빚진 종에 대한 탕감,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죄를 묻지 않음,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비유 등등.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용서에 관한 강론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나아가는 것도 용서와 관계되어 있다.
위 아래 관계에 있던 것이 등동한 관계를 가지려면
아래에 있던 사람을 받아들여만 가능해진다.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소수민족, 흑인, 외국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버리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현재 우리 교회의 소공동체 운동도 여기에 해당된다.
소공동체 운동은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본당의 주인은 본당신부가 아니라 본당신부와 함께
교회 구성원 전체라는 의식을 가르치는 것이 소공동체 운동이다.
위계질서가 곧 바로 권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초등학생만 되어도 금방 알아듣는다.
“아빠면 다에요?”하고 따질 줄 알기 때문이다.
아빠는 멋대로 교통질서를 어기고, 거짓말 하고, 싸우고, 욕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려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 모든 관계가 수평을 이루어야 하는 건 아니다.
갓 태어난 아이와 온갖 풍상을 겪어낸 할아버지가 수평적인 것은 누구나 존엄한 한 인격체로서지,
그 연륜과 경험과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동등할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늘 말씀의 기쁜 소식은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는 말씀일 것이다.
함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고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함께 하는 것이 바로 받아들임, 수용, 인정, 용서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분께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분께 인정받고 있고,
그분께 용서받고 있다는 뜻이니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지금은 우리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언젠가는 한 자리에 함께 모여 기도하려면 먼저 화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돌아와서 예물을 바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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