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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목요일 본문+해설+묵상>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29 조회수453 추천수1 반대(0) 신고
 

주님 만찬 성목요일


<파스카 만찬에 관한 계명>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12,1-8.11-14

그 무렵 1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2 “너희는 이달을 첫째 달로 삼아,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3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에게 이렇게 일러라.

‘이달 초열흘날 너희는 가정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집집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4 만일 집에 식구가 적어 짐승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사람 수에 따라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짐승을 마련하여라. 저마다 먹는 양에 따라 짐승을 골라라. 5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6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7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8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

11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12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14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6(115),12-13.15와 16ㄷㄹ.17-18(◎ 1코린 10,16 참조)

◎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로다.

○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리라. ◎

○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의 눈에는 소중하도다.

나는 주님의 종, 주님 여종의 아들.

주님께서 나의 사슬을 풀어 주셨도다. ◎

○ 주님께 감사의 제물을 바치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리라.

주님의 모든 백성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들을 채워 드리리라. ◎ 


제2독서 


<여러분은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1,23-26

형제 여러분, 23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요한 13,34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15

1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2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3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4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5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6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7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8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9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11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팔아넘길 자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13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14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해설과 묵상


제1독서(탈출 12,1-8.11-14) 해설

<파스카 만찬을 매년 거행함으로써

히브리 백성은 자기네가 해방된 사건을 다시 새롭게 한다>


파스카(과월절)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다. 즉, 과월절은 유목민들의 축제였다. 그 축제를 지내면서 그들은 어린양(또는 염소)을 잡아 바침으로써 자기네 가축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사를 바치고, 입구 가까이 있는 천막의 말뚝들에다 어린 양의 피를 뿌림으로써 그 천막을 드나드는 사람들 위에 복을 기원하였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광야로 주님을 예배하러 갈 수 있도록 요구한 축제가 아마 이런 축제였으리라. 그러나 모세의 요구는 거절당하고 말았다(국가의 안전 또는 이익 때문에).

파스카 축제가 그때까지만 해도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실과 결부된 의미들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후대에 가서 누룩 없는 빵의 축제에서 비롯된 의미들도 들어가게 되었다. 누룩 없는 빵의 축제는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진 사실과 결부된 농사축제였다.

오늘 읽은 탈출기의 본문에는 특별한 ‘기념제’를 설정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들어 있다(14절). 즉, 기념제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기억되는 바를 지금의 현실과 결부시키는 행위이다. 그 ‘기념제’를 통하여 모세와 그의 세대만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자가 바로 오늘의 너인 것이다.”(참조. 신명 16,1-8)

파스카 만찬 때 가장이 교육하는 내용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종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그 종살이에서 우리를 탈출시키셨다.… 만일 찬양하올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주시지 않았던들,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우리 후손들이 아직도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종노릇을 할 것이다.”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파스카의 어린 양이신 예수께서도 빵을 쪼개어 주고 술잔을 돌림으로써(파스카 예식에 속하는 행위들) 당신 제사의 ‘기념제’를 제정하고 과월절을 완성시키신다(죄의 올가미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신다.). 십자가의 제사는 성찬례 안에서 오늘의 우리 자신의 현실로 변한다. 미사성제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현대에 사는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며, 십자가의 옆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화답송(시편 116[115],12-13.15와 16ㄷㄹ.17-18[◎ 1코린 10,16 참조]) 해설

<축복의 잔을 마실 때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나이다>


이 시편은 히브리인들이 파스카 예식을 마치고 부르던 찬미의 노래 ‘할렐’ 시편들(시편 113-118)에 속한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성찬례(성체성사)를 제정하신 다음에 이 찬미의 시편들을 노래했다(참조. 마르 14,26; 마태 26,30).

이 시편은 시련을 겪은 다음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 술잔을 축복하면서 찬미의 제사를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감사를 표시한다.

성찬례에서도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쏟으신 예수님의 피에 동참한다는 표시로서 그런 예절을 거행한다(참조. 1코린 10,16). 이 시편은 다시금 노래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께 충실한 자들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재현(再現)하며(그리스도의 충실한 증거자, 묵시 1,5), 그들의 죽음은 피조물을 창조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는 자리가 되기 때문에 주님의 눈에 귀중한 죽음이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신자들의 죽음이 결합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충실한 신자들의 수난으로 완수하는 것이다(참조. 콜로 1,24).


제2독서(1코린 11,23-26) 해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다>


성체성사의 제정을 상기시키면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성사적(聖事的)인 몸과 그리스도의 신비체(神秘体)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

코린토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는 성찬례를 거행하면서도 ‘주님의 만찬이라 할 수 없는’(20절)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성찬례에 관계된 전승만을 똑똑히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라(코린토에서의 문제는 형식적 예절의 절차가 아니었다.), 성찬례의 ‘기념제적’ 성격을 분명히 하려 했다. 성찬례는 심판하고 구원하는 효과적인 사건인 십자가 사건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 만든다.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고유한 전례이다. 그러나 코린토 신자들은 서로 갈라져서 성찬례의 본래 의미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경제적인 분열이 문제였다(성찬의 음식을 나누어 먹는 데서부터 형제적인 나눔이 되기는커녕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자들을 분열시키고 반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성찬례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만찬이 아니라 단죄하는 만찬이었다(참조. 29절). 코린토 신자들을 꾸짖었던 바오로가 오늘날 우리 신자들의 성찬례를 보고는 과연 어떤 말을 하겠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24-25절) 여기에서 말하는 ‘기억’은 현대적인 의미의 단순한 과거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셈족 문화와 예식 특유의 ‘기념’을 말한다. 셈족에게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은 그 예식을 거행하는 가운데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현실로 다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찬례에서 옛날 제자들과 함께 계시던 그리스도께서 ‘성찬의 빵과 술’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당신의 신비체로 만드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도구가 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오늘의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활동하신다(참조. 1코린 12,12 이하). 그 때문에 교회의 일치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교회의 분열은 예수 그리스도께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는 짓이다. 교회의 분열은 ‘죽음의 독약’이다.


복음(요한 13,1-15) 해설

<주님의 지극하신 사랑>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더불어 파스카 성찬을 나누시는 중에, 그들의 발을 씻어줌으로써, 제자들의 직무가 지녀야 할 겸손한 봉사의 성격을 밝히신다.

준비하는 시간이 지난 다음(요한 1-11) 그리스도의 ‘시간’에 다다른다(참조. 요한 11,9). 그 시간은 그분이 영광을 받는 시간이요(참조. 요한 12,23.27), 당신 사명을 완수하시는 시간이다(“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요한 19,30). 이 완수하시는 시간에 요한 13,1의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요한 13,1이 이미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예수님의 시간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시는(영광을 받으시는) 시간이요, ‘당신 사람들’(세상, 인류)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의 시간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요, 사명이다.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과 더불어 잡수신 최후만찬 때 취하신 행위는 그러한 사랑을 드러내 주는 증표였다. 요한은 성체성사의 제정과 발을 씻어 주신 행동을 한꺼번에 제시함으로써 성체성사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려 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고 십자가의 기념제인 성찬례를 제정해 주심으로써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사야가 예언한 ‘종’으로서 제시할 뿐 아니라, 당신 사람들을 깨끗이 해 주신다(10절). 몸만 깨끗이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세계에 동참할 수 있게끔 마음도 깨끗하게 해 주신다. 요한 2에 나오는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벌이는 메시아 시대 혼인 잔치의 기쁨을 암시한 바 있다. 유다인들이 몸을 씻는 데 쓰던 항아리들의 물을 술로 변하게 하셨다는 것이다(참조. 2,6). 단순한 물은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지 못하고, 우리의 죄 때문에 짊어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그분의 죽음만이 사람을 참으로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세례와 성체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한다(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성찬례에 효과 있게 참여했다.

만일 십자가(성찬례에서 재현된다.)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 성찬례(그리스도 십자가의 재현)는 우리에게 하나의 명령으로 제시된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14절) 예식에서 하는 동작에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과 삶 자체를 나누어 주고 섬기는 생활이 되게 할 일이다.

주님이요 스승이신 분한테서 나누고 섬기는 생활을 하도록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의미의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봉사한다.’ 함은 무엇을 청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봉사한다.’ 함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세상으로 건너가도록, 즉 하느님의 사랑의 왕국으로 들어가도록 깨끗이 씻어 줌을 뜻한다. 예수님의 제자인 신자들이 행하는 이 같은 봉사는, 하느님은 사람을 사랑하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말과 생활로써 알게 해 줌을 뜻한다. 우리 생활 전체로써 십자가의 설교가 믿을 만함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지만, 십자가야말로 구원을 가져다주는 참되고 유일한 원천인 것이다.


묵상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만찬을 함께 나누셨다>


성 목요일의 만찬 미사는 파스카 신비 전체를 드러내고 있다. 성 목요일에 이어지는 나머지 삼일 동안에 수난과 묻히심과 부활의 신비가 차례대로 거행될 것이다.

성 목요일의 미사는 깊은 의미를 띤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미사는 ‘그리스도의 봉헌된 사랑과 충만하게 만나는 체험’을 갖게 하기 위한 미사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죽음에 내맡기기 전에 제자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주신다. 히브리인들이 파스카 만찬에서 빵을 나누는 그 순간에, 예수께서는 각 사람과의 참되고 구체적인 생명의 나눔을 실현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주신다.

이 순간을 위하여 머나먼 옛적부터 준비 기간이 있어 왔다. 이스라엘의 온갖 체험이 예수님의 이 행동에 집중되어 있고, 인류의 모든 종교적 체험도 그 행동에 집중되어 있다.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그 빵은 히브리 백성의 역사보다 훨씬 오래 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똑같은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거의 모든 백성들에게 생명의 나눔을 의미했다. 밥상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위해 주고) 받아들임을 의미했다. 원시인도 자기 동류인 사람들과 결속되어 있고 자기 동류인 사람들을 위해 줄 때에만 자기 자신의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자기가 사로잡은 노획물을 그들과 나눌 필요를 느꼈다. 자기가 사람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같은 생명의 나눔에서 비롯했다. 그것은 단순히 자기 보존 본능에 따를 수밖에 없는 동물과의 차이점이었다.

밥상에 함께 앉는 일은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고대 백성들의 혼인잔치, 제사잔치의 의미가 거기에 있었다. 그 잔치에서 제물을 신에게 바치고, 그 다음 신 앞에서 함께 먹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파스카 잔치에서 자기네 역사 전체와 종교적 체험 전체를 재현시켰다. 파라오의 올가미에서 벗어남, 자유스런 백성으로 세워짐,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의 맺은 사랑의 계약이 재현되었다.

곧 떠날 사람처럼 서서 먹는 어린 양과 누룩 없는 빵은 해마다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이집트를 떠나 무작정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나서려 했던 옛 선조들의 상황 속에 다시 서도록 한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이스라엘 백성 각자는 하느님과 함께 한 신앙과 희망의 여정(旅程)에서 성공적인 이정표들을 상기하여 오늘에 되살려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파스카의 음식을 함께 먹는 예식을 영구히 거행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각자는, 하느님과 친교(親交)를 맺는다함은 같은 밥상에 앉은 모든 사람들과 끊을 수 없는 유대를 맺음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봉사는 수평적(水平的)으로 모든 형제들에게 연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으리라.


<서로 섬기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내린 엄한 질책도 위에서 말한 의미에서 읽어야 한다. 분열되고 마음이 나누어진 분위기에서 성찬례를 거행해 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유대를 성찬례의 기초로 삼으신 까닭이다.

서로 먼저 섬기는 자가 되려는 끊임없는 마음의 결정이 필요하고, 개인이익보다도 공동이익을 앞세우려는 마음의 결정이 필요하다. 겸손한 솔직함과 타인에 대한 가치 존중에서 우러나오는 이 같은 너그러운 자기 극복이 없이는 진정한 공동체생활(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단순히 ‘곁에’ 서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함께’ 생활과 생명을 나누어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최후만찬 때 예수께서 취하신 행동은 마지막으로 갑작스레 취하신 행동이 아니었다. 당신 생애를 통하여 줄곧 드러내온 태도와 처신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그렇지만 이 ‘섬기려 함’은 그리스도를 비천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영광을 빛나게 한다. 당신이 지상에 불 지르러 오신 사랑이 그 ‘섬김’에서 빛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배척한다 함은 그분의 ‘섬기려 하시는’ 사랑을 거절함을 뜻한다.

베드로가 그 사랑의 의미를 언뜻 깨닫지 못하고 발을 씻어 주시려는 스승을 만류한다.

베드로가,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고 사양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고 하셨다.

사랑으로 서로 섬기고 받아들이는 가운데서라야 진정으로 마음과 생명을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은 서로 먼저 봉사하고 봉사를 받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십자가에서 생명을 바치시기까지 ‘사랑의 섬김’을 보여 주실 필요가 있었다.

인류는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바치는 ‘사랑의 섬김’을 드러내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끝까지 서로 사랑하십시오>


오늘 주님의 만찬에 초대받은 우리는 기념하고 있는 이 사건의 주역들이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당신과 친교를 맺자고 제안하고, 당신의 수난과 희생에 참여하도록 제안하고 계신다.

끝까지 사랑을 받은 우리 역시 끝까지 사랑하는 응답을 드릴 수밖에 없다. 목숨을 바치는 그분의 사업에 끝까지 참여할 수밖에 없다.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그분은 먼저 우리를 당신과 한 몸 한 마음이 되도록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만찬은 무엇보다도 ‘그분과 더불어 음식을 먹게’ 하시려는 만찬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제물로 바쳐지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당신의 생명을 받아 살게 하시려는 만찬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은 주님의 수난-죽음-부활을 우리의 것으로 삼게 하시려는 만찬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남김없이 합일(合一)하기 위해 우리에게 사랑의 봉사를 베푸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빵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효성에 찬 빵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경제’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합당하게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가 없다. 그래야만 우리는 한 분이신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자녀와 형제자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성찬은 우리 사이를 혈육(血肉)의 사슬보다 훨씬 더 강한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사슬로 결속시킨다. 그 사슬은 우리를 한 가족으로 만들고, 인류를 영원한 생명을 받아 함께 사는 유일한 가족으로 만든다.

이같이 새로운 사랑의 질서에 들어서지 않은 이상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입으로 외어 보았자 아무 쓸모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오시되 혼자 오시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형제들로 주신 모든 사람(사람이면 모두 다)과 더불어 우리에게 오신다. 그러므로 만찬에 참여한다 함은 곧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몸인 인류와 친교(親交)를 맺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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