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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용서의 샘" - 8.1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2 조회수452 추천수7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8.12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에제12,1-12 마태18,21-19,1

 

 

 

 

 

"용서의 샘"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니 어서와 조배드리세.”

 

오늘 새벽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처럼,

하느님께 조배드리며 하루를 시작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이 힘을 주소서. 힘을 주소서.”(시편90,17).

 

위의 시편 말씀처럼,

주님의 은총을 간청하며 역시 하루를 시작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어제 장시간 면담했던 우울증을 앓는 청년의

다음 고백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생리적인 죽음이전에 희망을 잃으니 그대로 죽음이었습니다.

  몸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희망이 사라지니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새삼 희망을 주는 교육,

희망을 주는 정치,

희망을 주는 사회,

희망을 주는 가정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사라질 세상 희망이요,

또 자기 희망대로 보람 있게 사는 이들 얼마나 되겠는지요.

하여 시편에서도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라는

대목이 무수히 나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의 샘’이자 ‘용서의 샘’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무한한 용서입니다.

요즘 자주 운명에 대해 생각합니다.

나이 들어 갈수록 많은 이들이 운명론자들이 되어갑니다.

사람마다 타고 난 운명이 있고 결국 운명대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사실 자기 탓 없이 타고난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천성(天性;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 본성),

천재(天才;타고난 재주),

천품(天稟;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품) 등

모두 하늘로부터 타고난 측면을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사람은, 본성은 절대 안 변한다.’ 말하며

혹자는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자유로운 듯해도

타고난 운명의 DNA에서, 환경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운명론에 기울게 합니다.

하여 아무리 야단맞고 꾸중 들어도 계속 반복되는 행동입니다.

 

오늘 1독서의 에제키엘, 타고난 운명의 예언자입니다.

하느님의 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예언자,

우리 수도자들도 이와 흡사합니다.

사람 눈에 운명이지 하느님 눈엔 섭리입니다.

운명이라 할 때는 부자유이고 수동적이지만

하느님의 섭리라 할 때는 자유요 능동적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주님의 사람,

도저히 말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하느님 섭리의 사람 예언자 에제키엘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 것,

바로 이게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여 무지 속에 반복되는 악행이요 악습입니다.

에제키엘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이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지만,

요지부동, 마이동풍, 우이독경, 회개의 반응이 없습니다.

참 바뀌기 힘든 게 사람입니다.

자기를 깨달아 알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는데

자기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깨달아 아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래서 항구한 기도와 노력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쉽게 바뀌지 않는 사람이요 반복되는 잘못이니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이 아닙니까?

끊임없이 지칠 줄 모르는 용서에 항구하다 보면

언젠가 적절한 때에 하느님은 은총으로 그 마음을 바꿔주실 것입니다.

삶은 용서의 여정입니다.

끊임없이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 하는 용서의 여정입니다.

이래야 살 수 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만 탈렌트 빚진 자는 우리를 상징하며

만탈렌트 탕감해준 주인은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만탈렌트 탕감 받고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모질고 인색하게 대하는 모습 역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깨닫고 보면 우리 모두

하느님께 만 탈렌트 사랑의 빚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살아있음이 은총이요 기적이요 감사입니다.

이걸 깨달을 때 자비로운 주님을 만나 회개요 구원입니다.

끊임없는, 지칠 줄 모르는 용서의 샘되어 살 수 있습니다.

비로소 운명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하느님 섭리의 사람이 됩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매일 미사 중

형제들을 용서한 우리 모둘를 용서하시어

자유로운 주님 섭리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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