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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내세)은 있을까?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04 조회수658 추천수10 반대(0) 신고

 
복음: 마르12,18-27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부활의 세계는 어떠하냐고 묻는다.
묻는다기보다는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일곱 명이나 남편을 둔 여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 비웃고 있다.

예수께서는 모세의 "떨기나무 대목"을 들어 부활에 관해 말씀하신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이야기는 부활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대목이다.
부활(내세)에 관한 사상은 BC 2세기경에 가서야 서서히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또한 마르꼬 복음사가는 

떨기나무 대목(탈출 3,1-6)을 부활에 관한 말씀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모세는 하느님을 만나기 전까지 평탄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살해될 위험에 처해졌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어미의 젖을 먹으면서도 어미라고 부르지 못하고 자라났고,

화려한 왕궁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존재는 늘 부평초같았다.

 

이집트인들 속에서 살면서 그들과 동질성을 느끼지 못해

늘 국외자의 그늘을 안고 자랐다.

어느 날, 핍박받는 자신의 동족을 역성든 일이 빌미가 되어,

파라오를 피해 사막으로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찌어찌해서 미디안 사막 사제의 딸과 결혼을 하고

그럭저럭 타향살이에도 익숙해져 갔다. 
모세가  첫 아들을 낳고 '게르솜'이라 이름 지었는데,

게르솜은 "내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구나"하는 뜻이다.

그런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뿌리에 그리움을 품고 살았다는 반증이다.

 

따지고 보면, 그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부모, 민족, 땅과 같은

근원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일생 고통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이다.

즉 한 인간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제를,
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번민하고 갈등했던 모세의 내면의 이야기가

탈출기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불이 붙어 있으나 타지는 않는 신기한 떨기나무를 본 것이다.
떨기는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시나무의 일종이었다.

이 신비스러운 나무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여러가지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남의 땅에서 이방인 신세로 살아가는 모세의 척박한 모습이 가시나무라 한다.

그의 뿌리, 정체성에 대한 식지않는 갈등을 불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그 내면의 불은 활활 타오르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하느님을 만난 이후,그 불은 비로소 활활 타오를 것이다.)

 

또 다른 설명도 있다.

즉 모세와 그의 동족의 운명이 마치 볼품없고 초라한 가시나무로 상징되고,

그들의 고된 현실을 불로 설명한다.

사실 그들은 사막에 내리쬐는 불볕과 같은 혹독한 에집트의 학정에 의해 

모두 한 줌의 재로 사라져버릴 수 있는 미미한 노예들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타 없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끈질긴 존재들이었다.

 

또 혹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그 나무가 불에 타지 않는 이유도 설명한다.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심으로써 태양신의 화신인 파라오의 강렬한 불길도

그 초라한 가시나무 하나조차 어쩌지 못했다고.

아무튼, 어떤 그럴듯한 설명을 다 한다해도

그 안에서 모세는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 일은 그의 일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여기서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주목해볼 구절은,

주님이 떨기 나무 안에서 당신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예전부터 자신의 신원에 대해 죽 의문을 안고 살아왔던 모세. 
낯선 땅에서 이방인 신세가 되었다는 한탄을 큰아들의 이름으로 지은 모세.

그런 모세에게 "네 아버지"라는 말, 그리고 그의 조상들 이름을 하나씩 거론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버지! 조상! 민족!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서도 선뜻 떨쳐버릴 수 없는 단어,

아니 나이가 들면 들수록 뼈속으로 파고 드는 말들이 모세를 심층에서부터 흔들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그가 일생 고민하던 문제들 즉, 아버지(출생의 문제)와

동족들의 문제에 관해 먼저 말씀을 걸어오신 것이다.

그가 고민하고 있던 그것이 마치 주님의 문제이기도 한 것처럼.

 

그렇다. 

그의 삶 속에 그분은 언제나 같이 계셨으며 그와 함께 동고동락하셨다.

그리고 그의 조상들,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과도 함께 계셨다. 

그래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었고, 이사악의 하느님이었고, 야곱의 하느님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이 지나간 과거의 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 조상들은 하느님 앞에 영원히 '살아있는' 이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고 이사악의 하느님이고,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모세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 안에는 그분이 '살아있는 하느님'이며

동시에 '산 이들의 하느님'이심을 가르쳐주는 두 사상이 내재해있다.

 

하느님은 그분의 백성 안에 언제나 살아 계셔서 그들의 하느님이 된다.
과거 조상들 뿐만 아니라,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또 미래 사람들의 하느님도 되신다는 말이다.

 

또한 그분의 백성이 되면 모두가 그분 안에서 살아있는 이들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시간 안에서 태어나고 죽지만,

영원하신 하느님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시간을 벗어나게 되는 때, 곧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영원한 그분을 마주 보게 될 것이다.

영원히 살아계신 그분 앞에서 우리도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로 마주 서게 될 것이다.

 비록 현세에서는 죽음이라 일컫는 것도, 내세에서는 죽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가 그분 앞에 살아있고, 그래서 그분이 '산 이들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은 믿으면서도

부활이나 내세를 믿지 않는다는 사두가이들의 모순된 주장을 반박하신다.

그리고 부활(내세)의 모습을 가르쳐주신다.

그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늙는 일도 병드는 일도 없이

하늘의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이다.

 

사두가이들은 사후의 문제보다는 현재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갖자는 현실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부활(내세)이 있다고 믿음으로 해서 현재가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더 현실을 잘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모세가 하느님 앞에 살아있는 조상들을 찾고, 그 조상들의 하느님을 만난 후,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이유와 사명을 찾았던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부활을 믿지 않는 신종 사두가이들은 없는가?

 

  '만일 부활이 있다고 믿고 살다가 죽었는데 없다면, 그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믿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된다.

인간은 내기(결단)를 해야 한다.' -파스칼의 <도박>에 관한 단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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