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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
작성자김백봉7 쪽지 캡슐 작성일2023-07-02 조회수452 추천수5 반대(0) 신고

 

 

 

 

 

  

 

 

 

2023년 가해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

 

 

 

 

복음: 마태오 10,37-42

 

 

 



LORENZETTI, Pietro 작, (1325)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신 베드로의 후계자가 교황님이고 그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당신 예언자들임을 왜 믿어야 하는지 묵상해야 하는 주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파견하시면서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라고 하시고,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라고 하시며 교회를 받아들여야 교회가 받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죄를 용서해주시면 되지 교회를 파견하셨을까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로 교회 안에 묻혀 계시기 때문입니다. 
    6·25 전쟁 추운 어느 겨울날, 연료가 소진된 미군의 트럭이 한 다리 위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군인들이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니 아기를 자기 옷으로 감싸고 죽어있는 한 어머니를 발견합니다. 한 군인이 어머니를 다리 주위의 큰 나무 밑에 묻고 전쟁 후 한 군인이 아기를 미국으로 데려가 키웠습니다. 아기가 청년이 되자 양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한국을 다시 찾았습니다. 아들에게 친어머니의 무덤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날도 아기를 발견한 날처럼 매서운 추위가 몸을 움츠러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자기 겉옷을 어머니 무덤에 덮어주며 “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이웃을 위해 나의 겉옷을 벗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능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리스도이고 미군은 교회이며 아들이 우리들입니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죽음을 가르치셨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죽음으로 죽음을 가르치시기 위해 죽으셔서 우리에게 보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다만 더 나아지기를 희망하고 믿는 사람 곧,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존 오리어리는 어렸을 때 불장난을 하다가 자신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집을 전소 시켰습니다. 자신이 죽는 것이냐고 묻자 어머니는 “네가 죽고 싶으면 죽어도 돼. 그것은 너의 선택이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예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착해지기를 방해하는 유일한 원수는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존 오리어리가 사고를 극복하고 훌륭한 강연가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게 된 이유는 어머니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방식은 예언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소위 개혁 갈멜회를 만든 인물들입니다. 이전의 수도회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모습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철저히 주님 뜻을 따르는 수도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전 생활을 하던 수도자들과 신자들에게 커다란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를 위해 물 한 잔을 주는 모습입니다. 과부의 헌금처럼 재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겠지만, ‘교회를 위해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분명 교회를 예언자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부와 권력으로 교회가 타락해 갈 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의 모범으로 교회를 개혁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죄를 용서해 주라고 파견하신 교회를 부정하였습니다. 교회를 받아들임은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 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교회로 가서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비록 잘못하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교회 자체를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교회 개혁에 힘썼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씀만 반복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걱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구원과 직결됨을 깊이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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