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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월 8일 야곱의 우물- 마태 9, 9-13/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08 조회수467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9-­13)
 
 
 
 
마태오복음 8­9장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느님 백성의 질병을 치유하시는지 서술합니다. 예수님은 쉬지 않고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언제 어디서 일어난 일인지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의 맥을 이어갑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듯 죄인을 치유하십니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시는 예수님께 그들은 용서받고 치유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태오는 예수님 시대의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 당시 세관원들은 그 지역을 통과하는 물품과 생산물에 세금을 붙이고, 여러 가지 간접세(판매세·관세·운임세·통행세 등)를 거두었습니다.
그들이 거둔 세금은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돌아갔습니다. 헤로데에게 바쳐야 할 것 이상을 거둬야 자기들 몫이 떨어지므로 그들은 많은 세금을 거둬 부를 축적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야 자신들이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일의 특성상 그들은 이방인들도 상대해야 했습니다. 부정직하고 탐욕스러운 그들의 만행은 당연히 율법을 위반하는 범죄인지라 그들은 죄인이나 사기꾼으로 낙인 찍혔고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 직업을 가진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예수님은 보십니다(9절). 그냥 지나치실 리 없습니다. “나를 따라라.”(9절) 마태오의 부르심도 첫 제자들의 부르심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처럼(마르 1,16-­20) 느닷없고 갑작스럽습니다. 부르심 받은 마태오의 응답 또한 즉각적입니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9절) 제자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마태오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다른 죄인들 무리뿐 아니라 동료 세관원들도 초대합니다(10절). 특별한 손님을 집에 모신 만큼 가까운 이들에게 자랑도 하고 그들의 부러움도 사고 싶었겠지요.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10절) 예나 지금이나 식사는 혼자 먹으면 먹었지 아무하고나 하지 않습니다. 철저한 유다인들은 더욱 죄인들을 기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열려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무리에 끼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당시 천대받고 따돌림당하던 무리들이 그분과 한 밥상에 앉아 있습니다. 정작 바리사이들은 멀찍이 구경만 합니다. 아무리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들어오지 않는 이를 억지로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고도 남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11절) 정결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거스르는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의 행태를 눈뜨고 볼 수가 없어 그들을 비난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을 죄인 취급하며 상종하지도 않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9,10; 11,19), ‘세리와 창녀’(21,31-­32)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경건한 사람이 이런 부류의 죄인들과 식사를 하는 것은 더더욱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반대이십니다. 오히려 무식꾼과 죄인들과 더 잘 어울리셨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11,`19)라는 소문이 파다했겠습니까?
 
부정한 이들과의 식사야말로 형제적 친교입니다. 바리사이의 관점과는 반대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12절) 병든 이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죄인들한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의인이라 자처하는 이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보다는 자신의 의로움에 자족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는 바리사이들의 자만이야말로 불치병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13절)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예수님의 영향을 받은 바오로도 모든 차별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3) 희생 제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죄인들과의 식사,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는 첫 단계인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하는 데 실패하고 호세아의 메시지도 오해합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에 첫 긴장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대적자들에게 놀라우리만큼 날카롭게 대응하십니다.

미국의 시인 윌콕스는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그 기준이 놀랍습니다. 아예 이런 사람 저런 사람 편 가르는 것을 거부하는 듯합니다. 누가 누구더러 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그저 사람일 뿐입니다. 다만 서로 필요할 때 기대고 받쳐줄밖에요.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오늘날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요.
부자와 빈자는 아니에요. 한 사람의 재산을 평가하려면
그의 양심과 건강 상태를 먼저 알아야 하니까요.
겸손한 사람과 거만한 사람도 아니에요. 짧은 인생에서
잘난 척하며 사는 이는 사람으로 칠 수 없잖아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도 아니지요. 유수 같은 세월
누구나 웃을 때도, 눈물 흘릴 때도 있으니까요.
아니죠. 내가 말하는 이 세상 사람의 두 부류란
짐 들어주는 자와 비스듬히 기대는 자랍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가는 이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남에게 당신 몫의 짐을 지우고
걱정 근심 끼치는 기대는 사람인가요?

- 엘러 휠러 윌콕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장영희, 「생일」 재인용)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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