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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관상과 활동과의 관계/영적성장을 위한 감성수련 문종원신부님
작성자조연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05 조회수569 추천수5 반대(0) 신고




 

 

 

* 관상과 활동과의 관계 *
 
관상과 활동과의 관계는
교회초기에 다양한 기도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논쟁 또한 관상과 활동의 관계에 관한
교회의 논쟁의 긴 역사를 보여줍니다.
세 가지 차원의 논쟁이 일어나는 데
하나는 관상을 활동보다 높이 사는 것이고
두 번째는 활동을 관상보다 위에 둡니다.
세 번째는 두 관계의 일치를 추구합니다. 
 
 


1. 관상보다 활동을 위에 둔다.

 

 교회 영성사에 있어서 몇몇 학자들은

관상이 활동보다 우위에 있다고 봅니다.

성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챤 삶의 완성은 관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관상의 삶을 활동과 비교할 때

마리아와 마르타를 이야기할 때처럼

관상적인 삶의 우위를 이야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마르타는 좋은 몫을 택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더 좋은 몫을 택했다.

그녀는 말씀 곁에 머무르는 관상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리아와 마르타와의 관계에서

관상을 활동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면서 이야기합니다.

“마리아는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

마르타가 바쁘게 일하는 반면에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리아의 몫은 영원하지만 마라트의 일은 일시적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있어서

관상과 활동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비록 그가 전통적인 성서와 수도회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그러나 관상의 삶이 객관적으로 활동의 삶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지만

그는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우월성이 바뀐다고 했습니다.

대 교황 그레고리오스와 같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활동의 삶이 관상의 준비로서 수덕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하지만

사도적 직무가 깊은 내면의 삶과 자비의 완성을 이루도록

흘러들어 갈 때 그 자체로 신비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토마스의 신학 안에 관상 또는 관상의 삶의 상태에서만

완덕에 이른다는 제한 된 개념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2) 관상보다 우위에 있는 활동


4세기에 바실리우스는 활동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관상의 완성은 에크하르트와 같이

자비와 사랑을 통한 활동에 있다고 봅니다.

다른 말로, 그는 마리아의 위치보다

마르타의 위치가 더 우위에 있다고 봅니다.

“성숙한 사람에게는 관상이 활동과 다르지 않고

관상이 활동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

자비와 자비를 가지고 행한 활동은 그 자체로 관상의 행위이다.

이것이 영적 성숙의 완성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통해서 드러나는 이러한 활동들은 방해받지 않는다.

마르타는 참으로 진실하기에 그녀의 활동이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성숙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마르타는 이미

상당히 오랜 기간 마리아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는 마르타를 성숙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다른 말로 순수한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에크하르트는 “첫 번째, 마르타는 실천을 통해 그의 과업을 잘 이루었고

두 번째, 사랑이 요구하는 가장 높은 차원에서 외적인 일을

어떻게 성취해야 하는 지 알 수 있는 순수한 지혜를 얻었고

세 번째, 마르타의 성숙의 표지로 그녀의 과업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마리아가 하느님의 발치에 머무는 관상으로만 끝났다면

이것은 영적 여정에서 불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마리아의 몫은 마르타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일하는 지를 배워야 하고

사랑으로 일을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관상 후에 마르타는 새로운 소명을 받는 데

그녀의 과업을 통해 세상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폭스는 마르타는 마리아가 마르타를 아는 것보다도

더 마리아를 잘 알 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르타는 그녀의 삶을 통해 가장 숭고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관상과 활동의 일치


성 베네딕도는 관상과 활동의 일치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균형을 이룰 것을 강조합니다.

성 베네딕도 후에 몇몇 수도자들은 수도자의 삶은

수도자의 내면적 완성에 가장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베네딕도 수도사들은 관상과 신비적인 상태를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베네딕도 수도사들은 개인적인 거룩함보다는

공동체를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관상의 사랑을 통해 이웃에 대한 사랑을 게을리 하지 않는 표양을

보여 준다.”고 말하면서 균형을 강조합니다.

성 이냐시우스도 관상과 활동사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헨리뉴먼은 하느님을 관상하는 영혼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희열을 얻는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마리아뿐만 아니라 마르타의 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자신의 위치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계속적인 순종을 통해 하나는 노동으로

하나는 고요로 그분께 흠숭을 드립니다.

노동자체도 하느님을 위한 것이고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도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마르타는 관상과 활동에 균형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세상과 이웃을 위해서 일할 때,

그녀는 내면 세계의 빛을 유지했습니다.

세상 안에서 그녀의 소명은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녀의 활동과 추구한 모든 것은 영원한 행복을 손상시키지 않았습니다.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라”(요한 12,35). 라는 요한 복음의 말씀과 같이

내면의 빛과 외적인 활동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감성수련문종원베드로신부

cafe.daum.net/mj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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