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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은 무엇인가? - 2013.8.4 연중 제18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04 조회수450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3.8.4 연중 제18주일 코헬1,2;2,21-23 콜로3,1-5.9-11 루카12,13-21

 

 


삶은 무엇인가?

 

 


오늘은 ‘삶의 무엇인가?’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영어로 하면 ‘What is life?’로 삶의 뜻은 훨씬 포괄적이 됩니다.
삶, 인생, 생명, 일생, 생애 등 모두를 포괄하는 단어가 ‘life’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삶은 무엇입니까?
삶을 무엇이라 정의하겠습니까?

삶은 신비입니다.
하여 사람마다 삶에 대한 정의도 무궁무진합니다.

 

삶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물어야 답도 나옵니다.

삶은 무엇인지 평생 물어야 하는 화두입니다.
평생 살고도 무엇을 살았는지 모른다면 허망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되는대로, 함부로, 막 살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인생입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첫째, 삶은 허무(虛無)가 아니라 하느님 찬미(讚美)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치가 절묘합니다.
1독서 코헬렛의 서두 말씀을 읽을 때마다 충격입니다.
머리가 텅 비워져 할 말을 잊습니다.

‘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공동번역의 순 우리말은 더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더 붙이겠습니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헛될 뿐이기 때문일 겁니다.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제 몫을 넘겨주는 사람은
더욱 허무를 절감할 것입니다.

태양 아래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날이 근심으로 걱정으로 밤에도 쉴 줄 모르는 마음 이 또한 허무입니다.

 

도대체 허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삶의 본질은 허무라 할 만합니다.
세상에 허무를 피해 도망 갈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언제 어디에 있든 어둠처럼 스며드는 삶의 허무,
아마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영혼의 질병이자 블랙홀 같은 허무요,
허무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도대체 허무에 깊이 감염되어
삶의 의미와 기쁨을 잃고 무너져 폐인이 된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무기력, 무감각, 좌절, 절망, 우울증, 치매 모두가 허무로 인한 피해입니다.
활력을 빼앗아 서서히 고사시키는 영혼의 암 같은 허무요,
모두를 빨아드려 무기력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어둡고 무겁게 하는
허무의 블랙홀입니다.

 

삶은 허무입니까?

아닙니다.
허무로 아까운 인생 끝낸다면 너무나 억울합니다.

허무는 답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으라는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
삶은 허무가 아니라 하느님 찬미입니다.

영혼의 불치병 같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하느님 찬미뿐입니다.
오늘 새벽 시편찬미기도를 바치며 절절히 깨달은 진리입니다.

찬미의 빛 앞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허무의 어둠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주님을 노래 하리이다/이 목숨 있는 한 내 하느님 기리오리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주여, 주님은 드높은 창공에서 찬미 받으소서./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허무의 치유에 하느님 찬미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찬미의 기쁨에 사는 믿는 이들에게 삶은 허무가 아니라 찬미입니다.

하느님 찬미가 삶의 허무를 충만으로 바꿔줍니다.
죽음과 어둠의 허무를 생명과 빛의 충만으로 바꿔줍니다.
하느님을 찬미할 때 허무한 삶은 충만한 삶이 됩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둘째, 삶은 탐욕(貪慾)이 아니라 감사(感謝)입니다.

 

허무에 이은 탐욕이 또 영혼의 불치의 고질병입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탐욕의 병 지니지 않은 사람들 아무도 없습니다.
끝없는 탐욕은 흡사 탐욕의 블랙홀 같습니다.

탐욕 앞에는 지성도 이성도 참으로 무력합니다.
탐욕에 포로 되어, 중독되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눈이 가려 하느님도, 이웃도, 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히 자기 감옥에 갇힌 불통의 인간 괴물입니다.

참 사람 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가 그러합니다.
아니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많은 소출을 올린 부자의 독백을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위로 하느님과 옆으로 이웃과 안으로 나에 완전히 닫힌 불통의 모습입니다.
참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큰 깨달음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어리석은 부자는 물론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 이웃 앞에서 부유하지 못하면 그 재물은 무용지물입니다.

인색하지 말고 가진 재물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이웃과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견물생심이라 탐욕은 끝이 없고 호시탐탐 우리를 노립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탐욕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하느님께 감사(Deo Gratias)’입니다.

삶은 탐욕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있는 감사의 발견입니다.

충분히 받아 감사할 것뿐인데 욕심낼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다.
감사의 삶이 깊어갈 때 저절로 약화되어 사라져가는 탐욕입니다.

감사한 일들을 깨닫지 못해 끝없는 탐욕에 불평불만입니다.
감사가 없으니 겸손도 없습니다.

하여 바오로 사도는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삶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으며,
살아도 그리스도의 것이고 죽어도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바로 오늘 콜로새서가
우리 삶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통쾌, 명쾌하게 밝힙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형제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은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저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추구할 때,
또 찬미와 감사를 드릴 때 허무와 탐욕의 질병은 말끔히 치유됩니다.

건강한 영육의 삶입니다.
절대로 땅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바로 이게 우리의 참 모습이자 궁극의 희망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멀리하십시오.

 

우리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인간,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심을 깨달을 것입니다.

 

 

 

 

 

‘삶은 아름다워라(Life is beautiful!)’ 언젠가의 강론 제목이 생각납니다.

 

누구나 아름다운 삶을 소망합니다.
삶은 허무가 아니라 찬미입니다.
삶은 탐욕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삶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하루하루 찬미와 감사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살 때 아름다운 삶이요
하느님께 복 받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입니다.

 

강우일 주교님의 강론 말미가 아름다워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은
인간의 손으로 새긴 우상과는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놀랍고도 숨 막히는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다가 올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당신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숨 막히게 아름다운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으로 응답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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