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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성이란?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24 조회수450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영성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이런 얘기를 많이 하세요.

성경을 영성적으로 읽는다는 게 도대체 뭐냐? 영성이라는 거를 그냥 우리가

영어에서 소위 말하는 스피리추얼리티(spirituality)라고 얘기하는 건데요.

스피리추얼(spiritual) 하다는 거의 반대말은 그럼 뭘까요?

영성적이다의 반대말은?

 

그러니까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돼 있다면은 영성적이다의 반대말은

육적인 것이다. 영적인 거는 좀 보이지 않는 건데 육적인 것은 조금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이라는 것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보이는 육적인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또 그 안에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영성을 생각하는 그와 같은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문자는 어떻게

보면 육적인 겁니다. 그죠? 하지만 이것을 읽으면서 내 마음 안에 생기는 울림

그것은 영적인 겁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종의 하나의 훈련 영어로 우리가 디씨플린(discipline)

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훈련, 수련 뭐 이와 같은 건데 그런 식의 하나의 훈련을

하는 것. 그것이 이런 영성수련의 어떤 기본적인 틀인 거 같애요.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귀에 들리는 것을 듣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만져 보고

맛볼 수 있는 것을 맛보되 그것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내가 인식하려는 것.

그것을 알아 들으려는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의 입장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입장으로서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입장에서 한번 그와 같은

것들을 한번 보고 듣고 느껴보자. 이게 굉장히 영성 수련의 하나의 높은 목표가

아닐까?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마음에서 기도를 해 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

어요. 우리가 흔히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면은 십자가를 이렇게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지요? 십자가를 이렇게 올려다 보면서. 그런데 영성 수련이 갖고

있는 그 마지막 목표 지점에 가면은 나의 위치가 거기가 아니라 하느님과 같은

치에 있어야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매달린 그 예수님의 위치에서 세상을 한번 바라보게 되는 것.

우리가 보통 기도할 때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 밑에 신자들의 자리에서

저 위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면서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내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가 된다면은 나는 어디에

있어야 될까요?

 

그 십자가 위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또 나 자신을 성찰해 보는 것. 그것이 영성수련의 하나의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래서 온전히 하느님과 하나가 되서 하느님과 하나됨

안에서 세상과 나를 성찰해 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는데 두

가지 길이 있는거예요. 하나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지금 이 강의 시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해 드리는 것 같이 머리로 좀 이해할려고 그 말씀을 머리로 좀

우리에게 와 있는 텍스트를 머리로 이해할려고 좀 애써 보는 것. 이것을 좀

폼나는 얘기로 신학적인 접근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논리 아니면 우리가 갖고 있는 이성 이런 것을 가지고 하느님이 누구인가에

관해서 한번 대답을 찾아 보는 것. 이것이 신학적으로 하느님을 좀 알아가는 길

입니다. 반대로 무슨 기도회 체험이라든지 아니면 어떤 나눔 안에서라든지 아니면

생활 안에서라든지 아니면 어떤 피정의 체험이라든지 이런 걸 통해서 하느님을

느낌으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거를 조금 폼나는 얘기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직관을 통해서 안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인싸이트(insight) 라고 하는데요. 직관 뭐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것.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자녀들과 나누고 있는 그와 같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 이게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지요? 하지만 알고 있지요? 직관하는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끼리 만나면은 아, 저 사람이 나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아니면은

귀하게 생각하는구나, 아니면은 나랑 그렇게 크게 만나고 싶지 않구나. 뭐하는

구나 하는 것들을 우리가 그냥 느낌으로서 알게 되는 것.

 

하지만 그런 느낌은 언제나 옳을까요? 아니면 틀릴 때도 있을까요? 틀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만을 의존한다면, 직관만을 의존한다면은 그것도

역시 오류가 있더라. 따라서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그런 직관 또는 신앙, 느낌

이런 것들과 또 우리가 반대쪽으로 우리 머리로 하고 있는 신학, 논리적으로 좀

따져보고 그것이 옳은지를 한번 점검해 보는 거랑 그 두가지는 균형이 좀 맞추어

져 있어야 됩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두 가지입니다.

 

하지만 신학만 누가 열심히 공부하면서 신앙, 느낌, 직관 이런 것은 그거는 다

믿을 수 없는거야. 그런다고 얘기한다면 그것도 역시 옳은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뭡니까?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체험인데 이거는 어떤

논리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는 그와 같은 길이 아닌 거 같애요.

 

우리가 친구와의 우정을 나눌 때 아니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때 아니면은 가정

안에서, 아니면은 교회 안에서 그렇게 사랑을 나눌 때 그 안에서는 어떤 논리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과학자자 "아, 니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는 단지 뭐 몸속에서

나오는 도파민의 작용에 불과해." 하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산다면은 그것만큼

우울한 일은 없을 거 같애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반대로 논리도 중요합니다. 여러분들 혹시 보신 분도 있을텐데 [뷰디플 마인드]

라는 노벨 경제학상을 탄 존 네쉬(Jdhn Nash) 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아실 꺼예요.

1950년대의 아주 중요한 그런 게임 이론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논문을 발표

해서 30-40년 있다가 결국 노벨상을 받게 되는게 그 중간에 정신 분열증을 앓게

되요. 그러면서 계속 환영 같은 거를 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계속해서 나는 보이는데 다른 사람은 나를 미쳤다고 하니까

굉장히 답답한 그런 상황에 놓여요. 그런데 마지막에 그것을 이 사람이 논리로

극복합니다. 어떻게 극복하느냐하면 그 영화를 보시게 되면 40년 동안 자신 앞에

나타나는 환영이 있는데 그 중에 어떤 아이가 하나 있어요. 그런데 아이가 늙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나는 너를 분명히 보고 있지마는 너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것을 논리로 극복합니다.

 

따라서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 두개 중에 우리가 항상 그 어떤

것을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그런 어떤 딜레마에 빠집니다.

직관, 신앙 이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지 논리 같은 거는 필요가

없다라는 그와 같은 사람들도 있고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그 토마스 사도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게 너무 잘못되게

해석이 되면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거지요.

 

반대로 어떤 사람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지 그 외에 다른 것은

믿지 않겠다. 이것도 역시 올바른 태도는 아니예요. 따라서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저와 함께 이런 텍스트를 한줄한줄 뜯어 읽어 가시면서 이게 다라고

생각하시면은 그것보다 나쁜 거는 없는 겁니다.

 

이렇게 텍스트를 이해하고 나서 그리고 나서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내게 말씀하시는지 또 그것이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 내 삶 안에서 어떻게

체험 되는지 그런 어떤 궁극적인 신비를 향해서, 그런 신비로운 신앙의 체험을

향해서, 신비로운 하느님 체험을 향해서 나 자신을 열어 가는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꼭 이렇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거는 글쎄 뭐라고 그럴까요? "저랑 같이 1년쯤 가시면은 그렇게 자동적

으로 되요." 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그건 또 아닌 것 같애요. 그 자체가 하나의

은총이기 때문에. 여기서 은총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하느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뭡니까? 깨어 기다리는 겁니다.

 

그날과 그 순간이 언제 될지 모르니 깨어 기다려야 된다. 따라서 영성이라는 것이

말하고 있는 궁극적인 거는 바로 그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어 기다리는 태도

영어로는 어웨니스(awareness)라고 합니다. 그런 깨어 있음.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깨어 있음. "너희는 깨어 있어라."

절대로 잠자지 마라. 그런 어떤 불면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어라라는

건 하느님께 집중하고 그런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보면서 성찰하는

그와 같은 어떤 삶의 태도라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고런 깨어 있는 태도로 오늘은 여섯 번째 재앙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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