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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2주, 하느님의 자비 주일 - 김웅열 토마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12 조회수450 추천수7 반대(0) 신고

                                            

 

 

              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거룩한 의심!

 

찬미예수님!

한주일 내내 평안하셨습니까?

우리는 지난주일 부활대축일 미사를 지내고, 부활2주일 미사를을 봉헌하고자 합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셨죠?

제일 먼저 부활증인은 막달라 마리아이고, 또 베드로 요한에게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제 수도자들도 부활이 끝나면 엠마오로 떠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혹시 길에서 만날까~~

전국에 있는 신부, 수녀님들이 다 나오시니 예수님 만나는 게 아니라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게 신부님, 수녀님들입니다.


저희 세 신부도 강원도에서 오대산-주문진-미시령을 넘어-원통-충주로 해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만났습니다.

우리 신부님들 안에 있는 예수님을 만나서

세 사제가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되는 좋은 엠마오를 갔다 왔습니다.

 

 

또 어디 나타나셨냐?

소문을 듣자하니 감곡성당에도 나타나셨다!!!

 

그저께 감곡사제관에 나타나셔서

“토마스신부, 내가 부탁을 하나 하겠네!

“커피를 드릴까요?”

했더니 둥글레차를 드신다고 해서 잘 대접해 드렸더니

흐뭇해하시면서 얘기하시는데

“감곡성당에 와서 깜짝 놀랐는데 의자가 바뀌었더라! 번쩍번쩍한 새 의자로 바뀌었으니 김신부, 빚도 많은 데 어찌하려고?”

“예수님, 어차피 왕창 진 빚, 조금 더 진겁니다!”

 

 

예수님께서 집집마다 다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집은 부활절을 지낸 것처럼 얼굴이 기쁜데~~

어느 집은 여전히 사순절이고, 여전히 십자가 진 얼굴이더라!

예수님께서 이번 주일 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감곡신자 어느 한 집 예외 없이 다 다녀갔으니 그것을 믿고 모든 근심, 걱정을 하느님께 다 맡겨라!


저 전합니다!

차~암 찝찝하게 치네요! ^^

다시 한 번~~~~~~~~~~~

☓☓☓☓☓☓☓☓☓☓☓☓☓☓☓(박수소리)


그리고 성서에 보면 어디에 예수님께서 또 나타나셨습니까?

다락방에 나타나셨어요.

그 다락방에 누구누구 계셨습니까?

성모님과...유다스는 자살해서 이 세상에 없었고...또 누가 없었지요?

밖에서 빙~~빙~~ 도느라고

불행하게도 그 자리에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밖에 나갔던 토마가 들어오니 제자들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이 사람 어디 갔다 이제 오나! 우리는 주님이 살아오신 것을 보았네!”


그러나 토마는 안 믿었어요.

그 터진 입으로 “내 손가락으로 못 자국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밸밸 돌려 보고, 창 자국에 손가락으로 넣어 보고 촉감으로 느껴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 내가 오감으로 느껴야 주님 부활하신 것을 믿겠다. 고 합니다.


인류최초의 교회가 바로 다락방이었습니다.

분명히 토마는 교회를 떠나 있었고 예수님을 못 본 것입니다.


우리는 토마의 의심과 우리의 신앙심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주님의 부활은 과학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인간의 사고와 이치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수학적인 계산으로 되는 그런 과학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토마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동료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다고...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 직접 손으로 넣어보고 만져 본 후에야 믿겠다! 고 합니다.

 

토마의 이러한 의심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늘 있는 게 아닐까!

십자가의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주님이 계시다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 올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우리는 주님을 보아야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지는 않았어도 믿고 사는 게 너무너무 많습니다.

분도형제 일어나 보십시오.

어머니, 편안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그 어머니 친어머니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확인해 보셨습니까?

확인해 보지 않아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죠?

증조부, 고조부가 나를 낳아준 분이라는 것을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지요?

이 공기 중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단파, 중파, 초단파... 가 있고 수많은 공기가 돌아다닌다는 것을 의심해 본적이 없잖아요.


의심은 의심을 만들고 마침내 모든 것을 믿지 않는 불행한 정신병환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세상이 하도 거짓이 많고 남을 속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일단 의심해 보는 습관이 들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간, 쓸개라도 다 빼줄 것 같아도....

‘아니야, 믿으면 안 돼. 내가 저러다 속아 넘어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야!’


세상이 우리를 속이더라도 우리 신앙인은 어리석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바보로 사셨듯이, 우리도 큰 바보로 살아야 합니다.


어리석게 살라는 것은 지혜롭게 넓게 끌어안으며 살라는 그런 뜻일 겁니다.


사제는 알면서도 속을 때가 많습니다.

어느 분이 다급하게 사제관 문을 두드립니다.

“신부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제가 어디 가는 길에 돈을 잃어버렸습니다. 5만원만 주시면 제가 가자마자 온라인으로 부쳐드리겠습니다.”

몇 년 있다가 딴 본당에 갔는데 그 사람이 또 와서

“신부님, 제가 길을 가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5만원만 주십시오.”

그 사람은 내가 5년 전 그 신부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겁니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지만.... 그냥 줍니다.


보좌신부님께 그 이야기를 하면 “그 돈을 왜 줘요? 경찰서에 넘겨버리지....”

“여보게, 세상이 얼마나 각박한가! 그러나 그 사람 나한테 와서 내가 속지 않으면...요즘 신부도 속지 않는 세상이 되었네! 어느 곳에 어리숙한 사람이 있어서...그래, 목사도 안 속고, 중도 속지 않는데, 그래도 신부는 속더라!”


알면서 속는 것과 모르면서 속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외인들이 보더라도 각박한 세상살이 가운데 천주교신자를 보니 없이 살아도 어딘가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늘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뭔가 푸근한 맘이 든다!!!


외인들이 보기에 천주교신자들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 나는 인간들이다!’

이런 소리 들으면 천주교신자 아닙니다.


우리 순교선조들이 지능이 떨어져서, 모자라서 산 속에서 어렵게 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른 곳에서는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해도 우리 천주교신자들은 쌀이 남아도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양식을 가지고 아랫동네에 내려가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모든 크리스천의 영성의 출발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박사 학위가 수십 개가 있다하더라도~~

예수님께서 하늘의 어리석음을 기준으로 사셨다는 것을 우리는 늘 명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눈으로 세상만사를 보면 모두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병적으로 의심하는 의부증, 의처증 환자등....

의심의 결과로 이렇게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 신자들이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의심하는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교회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때가 많습니다.

위대한 신앙가들도 가끔 의심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일시적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한 적이 있었지만 곧 돌아섰기에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토마 역시 일시적으로 의심을 품었으나, 그 의심을 통하여 더욱 굳은 신앙심으로 무장해서 인도까지 진출하여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일시적으로 의심을 품었지만, 의심이 들 때마다 굳은 신앙으로 불러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얼치기로 알고 있는 신조나 눈꼽만치도 믿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엄청나게 믿고 있는 것처럼 되풀이 되는 소리보다는.....

거룩한 의심을 통해 확신에 이르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초를 닦는 것입니다.


부부사이도 믿지 못하면 화목한 가정이 되지 못합니다.

친구사이도 믿지 못하면 참다운 우정을 간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의심 중에 한다면 응답의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토마는 교회 밖에만 벗어나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장소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 있었더라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하느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하면

‘고독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인 인간!’ 입니다.


고독하다는 것은 철저히 자기 안으로 들어가서 하느님과의 기도시간을 통해서 영적 에너지를 갖고 동시에 나가 그것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전혀 사회성이 없어요.

늘 본당에서 겉돕니다. 이것도 문제가 있어요.


어떤 이는 본당에서 어느 곳에 참석 안하는 곳이 없을 만큼 분주히 일하는데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하느님을 만나 고독해져야 합니다.

고독을 통해 하느님이 나를 먼저 적시고, 그 물이 흘러넘쳐 이웃에게 퍼져야 합니다.


토마사도는 예수님이 두 번 째 다락방에 들어오셨을 때 다시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사도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냥 가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다시 오셔서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진복자니라!”

그 말에 토마는 무릎을 꺾고 단 두 마디 밖에 못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토마의 이 신앙고백은 ‘이제 나의 나머지 삶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을 위해 내 남은 삶을 바치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야고버사도께서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물결과 같으며 이런 사람은 무엇을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치 말아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강론 후에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하느님을 의심 없이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입으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하느님을 믿는

거룩한 신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 하느님 자비주일 강론 2006. 04. 23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주만 바라 볼찌라>음악 김웅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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