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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8-05-08 조회수731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5월 8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I pray not only for these,
but also for those who will believe in me through their word,
so that they may all be one,
as you, Father, are in me and I in you,
that they also may be in us,
that the world may believe that you sent me."
(Jn.17.20-21)
 
 
 
제1독서 사도행전 22,30; 23,6-11
복음 요한 17,20-26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 갔다가 기억에 남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갓난아기의 똥 싼 모습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갓난아기의 똥 싼 것을 치우는 엄마의 모습이지요. 사실 이 갓난아기의 응아(새벽부터 자극적인 단어를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제부터 ‘응아’로 표현하겠습니다.) 냄새는 정말로 지독했습니다. 변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쁘고 귀여운 아이의 모습과는 달리 제 코를 자극하는 그 냄새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지요. 그래서 차마 코는 막지 못하고(혹시 아기엄마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 될까봐), 숨을 최대한 쉬지 않으면서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기엄마의 표정입니다. 그렇게 냄새가 지독한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웃으면서 기저귀를 갈아주네요. 아니 그것도 부족했는지, 가까이 얼굴을 대고 응아 색깔까지 이리저리 살핀 뒤에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이 아닙니까?

결혼해서 아기를 가지면 코가 막혀서 냄새를 맡지 못할까요? 아니지요.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아기와 관계되는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심지어 응아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엉뚱한 상상을 한번 해봐요. 만약 아기가 냄새나고 지저분한 응아로 엄마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응아 싸지 않겠어.’라고 다짐하고는 응아를 꾹 참는다면 어떨까요? 만약 아기가 이러면 엄마는 “에구, 우리 새끼……. 엄마 생각해서 응아도 꾹 참고, 너무 예쁘고 착하네.”라고 말할까요? 아니지요. 제때에 응아를 하지 않으면, 어디 잘못된 것이 아닐까 걱정하면서 병원에 데리고 갈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이 갓난아기보다도 더 철없고 어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하느님을 어려운 분으로만 생각하며, 죄책감으로 하느님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엄마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응아를 참는다고 그것이 효도가 되지 않는 것처럼, 죄책감으로 인해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느님께 충실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은 바로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주님과의 관계는 과연 어떤가요? 혹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노래 제목처럼, 주님을 내게서 멀리 떨어진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아주 가까이에서 가장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조그만 노력으로도 주님과 충분히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사랑합시다.




 

밥도 못 먹는다잖여(서경애, ‘좋은생각’ 중에서)

한창 은행 업무에 바쁜 날이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께서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지폐 서른 장과 계좌번호가 쓰인 종이를 내밀면서 내게 돈을 부쳐 달라고 하셨습니다. 종이를 보니 에티오피아 기아 아동에게 보내는 기금이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할아버지도 먹고 살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렸지요.

“이 돈으로 잡수시고 싶은 음식 사 드세요. 그곳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도와줄 거예요.”

“왜 그랴. 이것 보내 달라는데. 나는 밥 먹고 살아. 거기 아이들은 밥도 못 먹는다잖여.”

나는 부끄러워져서 할아버지께서 주신 돈 삼만 원을 원하는 계좌로 부쳐 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다음 달에도 천 원짜리 서른 장을 들고 은행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은행에서 할아버지를 만난 지 어느덧 삼 년. 늘 남루한 차림으로 오시는 할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할아버지도 살기 팍팍하실 텐데 꼭 이렇게 다른 사람을 도우셔야 해요?”

“그럼. 나 언제 죽을지 몰라. 칠십 년 동안 이 세상에서 잘 살았는데, 고맙다는 인산는 하고 가야지. 그래서 그곳 애들한테 돈 보내는겨.”

달마다 은행에 들르시는 할아버지께서 안 보이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어디 아프신지, 이사를 가셨는지 얼마 전부터 은행에 오시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알게 됐습니다. 돈이 많이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진 걸 그냥 나누는 것이라고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은행에 오시던 할아버지가 그립습니다.
 
 

Beauty of Forgiveness
 
Will Young-Ever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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