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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사회 교리 주간)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12-04 조회수569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랜만에 복음묵상을 올립니다. 오늘은 대림 제2 주일 인권주일이면서 사회교리주간입니다. 매일미사 첫 말미에도 나옵니다. 사회교리를 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간접적인 질문과 답이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를 보는 올바른 눈을 가지게 하며 시대의 징표를 식별할 수 있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사회교리를 알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완전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신문에서 한 칼럼을 읽고 사회교리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분은 카톨릭 신자입니다. 여기서는 그 정도 선에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새벽에 오늘 주일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원래 묵상의 주제에서 조금은 벗어나 묵상을 해봅니다. 오늘 복음의 큰 주제는 회개입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회개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 '회개'라는 말은 이제 식상할 정도가 됐다고 할 정도로 그만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강론을 가리켜서 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전에는 이분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면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떤 상황이 변해서 이해가 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은 전혀 변한 게 없습니다. 그 이유는 '회개'라는 개념에 대한 시야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회개' 하면 죄를 짖고 나서 용서를 구하기 위한 전제 수단의 절차적인 의미에서 '회개'를 많이 언급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기준과 범주 내에서 회개라는 용어를 잘 떠올리고 또 자주 반복되니 듣는 입장에서는 약간 식상한 면도 없지 않아 있을 수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저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에 개신교 목사님께 성경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그 어떤 목사님도 사실 여부를 떠나서 질문하는 순간 그 순간에 제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즉답을 들을 수 있었지만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해 이건 성경의 질문이라기보다는 성경의 내용이지만 약간 신학적인 내용도 가미가 된 질문일 수가 있어서 이 질문에 대해서만은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 목사님,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주시면 제가 제 인생을 예수님께 올인하겠습니다."라고 했던 질문인데 우리나라에서 이름 있는 목사님께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날 기회에 질문을 했지만 제 마음에 드는 속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개종 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누가 가르쳐줘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제가 그 답을 알게 된 것은 '회개'라는 이 개념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개념에 국한해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용어가 담고 있는 문자적인 의미로만 가지고 해석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제가 알고 있는 의미를 말씀드리기엔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 이 부분은 언급을 하기엔 적절하지는 않지만 한 부분만 언급을 하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를 짓고서 회개한다' 할 때 이때의 '죄'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면 일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라는 개념을 흔히들 '계명'을 어겼을 때 이때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하는 개념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 개념도 맞지만 죄라는 개념을 이 범주에서만 생각하면 제가 예전에 개신교에서 가졌던 의문과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아주 단순한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죄는 하느님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의 상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 예수님과 일치가 된 몸의 상태라면 죄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물리적인 거리의 개념의 거리가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치 속에 있다면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의 속성인 거룩함 속에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떨어져 있다는 것은 거룩함에서도 이탈된 상태가 될 것입니다. 원래 '거룩'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구별됨', '성별됨'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곳에서 떨어져 있는 그 상태가 바로 죄에 머물러 있는 상태와 같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개념으로 죄에 대한 인식의 개념을 확장하면 우리는 늘 '회개하라'라는 말을 아무리 자주 듣게 되더라도 더 이상 식상한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역으로 하느님과 일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회개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건 우리가 차량에서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에 찾아가는 목적지에서 경로가 이탈하면 새로운 경로를 다시 재설정해서 알려주면 우리는 그 경로를 따라가야만이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가 있는 이치와 같을 것입니다. 이 과정이 마치 우리가 늘상 해야 하는 '회개의 과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말씀이 제가 개신교에서 가진 의문 중에 하나였습니다. 내용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2000년 전인데 그렇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이 말씀의 효력이 유효하다면 그럼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 '부도난 수표'와 같은 것이 되는가?' "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어느 정도 제대로 이해를 하려면 '회개'와 '하늘 나라'에 대한 단순한 단어의 이미지만 가지고 이해를 하려고 한다면 제가 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결코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제가 이 부분에 대해 원어가 가진 시제를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이 '부도난 수표'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나라 시제에는 없지만 아마도 이 시제는 불어성경으로 보면 가장 잘 이해할 수가 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불어가 이런 부분에서는 잘 발달됐기 때문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완료시제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굳이 사실 말씀의 시제를 가지고 해석하지 않더라도 이미 의미적으로만 봐도 그렇게 봐야 예수님의 말씀이 부도난 수표가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영어에서도 불어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말보다 시제가 좀 더 발달돼 있는데 사실 '가까이 왔다'고 번역상으로는 그렇게 표현했지만 참고로 우리말 시제에는 완료시제가 없기에 이렇게 번역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이 있긴 합니다만 사실은 하늘 나라는 이미 우리 세상 속에 펼쳐진 것으로 봐야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로 접근해도 부도난 수표와 같은 말씀이지 않냐고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이런 논리로 접근할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 나라는 이미 우리가 사는 세상 한복판에 도래했지만 우리가 그 하늘 나라의 도래를 몸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늘 나라 즉, 천국의 개념은 우리가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서 가는 그런 세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런 하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음에 분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하늘 나라를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게 분명하지 않을까요? 물론 인간적인 생각의 논리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 더 깊은 신학적인 내용으로 접근한다면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신학자도 아니고 또 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 달리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비록 인간적인 논리의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한번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상 신부님의 강론과 더불어 복음이나 여타 다른 곳에서 끊임없이 회개의 요청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것도 항상 듣다 보니 때로는 식상하거나 진부하다고 느낄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해왔다면 이제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다른 시각으로 회개를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죄를 짖고 나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의 한 과정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하느님처럼 거룩한 몸이 되라고 하는 하느님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각으로 우리는 다시 한 번 회개의 개념을 좀 더 넓게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인권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이 부분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까 하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한 가지만 언급을 하자면 오늘 주일 보편지향기도 두 번째에도 언급됐습니다. 보호자이신 주님, 주님의 모습으로 지어진 저희를 돌보시어, 저희가 이기적 욕심을 내려놓고, 편견과 차별을 허물며,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는 데 서로 연대하며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어쩌면 이 기도문이 오늘 제가 묵상한 내용을 잘 함축해서 표현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순전히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사실 전례력으로만 보면 예수님은 해마다 성탄 때마다 오셨습니다. 성탄 때가 아니더라도 항상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다만,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사느냐 살지 않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 때 천국의 삶을 사는 데 최대한 예비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정말 잘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사는 데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설령 그 좋은 천국에 우리가 간다고 해도 우리의 내면에 변화가 없는 인간 본성의 삶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그 환경이 아무리 천국이라도 속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속단을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신부님의 강론과 또 수많은 교회의 영성가들의 말을 바탕으로 해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기간 대림시기를 잘 보내기 위해서는 판공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좀 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하늘 나라의 타작마당에서 알곡이 돼 하늘 나라의 곳간에 입성할지 한번 오늘 복음을 통해 잘 묵상하며 남은 기간 은혜로운 대림이 되기를 우리 모두 노력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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