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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89) 꽃 한 송이의 기도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9-12-01 조회수450 추천수3 반대(0) 신고
 
작성자   이순의 (leejeano)          번  호  6760           작성일    2004-03-29 오후 5:42:09
 
 
 
 

         (89) 꽃 한 송이의 기도

                                      이순의

 

한 송이 꽃은 손짓하지 않아도 바람이 손을 들어줍니다.

한 송이 꽃은 단장하지 않아도 꿀벌들이 날아옵니다.

꽃 보러 바람도 오고, 꿀벌도 오고,

한 송이 꽃은 거기 그 자리에 있어도 향기가 납니다.

 

그냥 거기 그대로 있어주면 좋았습니다.

웃다가 가고

보고파서 오고

살짝 머무르다 가고

스쳐 지나가다 오고

호탕한 흔들림이 좋아서

그만의 색깔이 기이해서

소문난 향기에 찾아서

그냥 항상 거기 그렇게 있는 꽃에게 손님이 왔습니다.

 

한 송이 꽃은 그냥 그런 선물을 주었습니다.

타고난 색을 잃지 않는 빛깔과

부여받은 향을 소멸시키지 않는 향기와

항상 고운 모습을 자랑하는 맵시와

늘 변함없는 선물을 오신 손님에게 주었습니다.

 

슬퍼하다 가더라도

기뻐하다 가더라도

앉았다 가더라도

쉬었다 가더라도

말하다 가더라도

손님은 손님의 마음대로 왔다가 마음대로 갔습니다.

꽃은 또 오실 손님에게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있고 싶습니다.

 

어느 날

소년 둘이서 꽃에게 왔습니다.

철없는 소년은 꽃이 거기서 그렇게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소년만 보고 싶고

소년만 웃고 싶고

소년만 쉬고 싶고

소년만 정담을 받고 싶은

소년만

소년만

소년만 하다가

그래서 거기 그렇게 있는 꽃에게 심술이 났습니다.

 

바람에게도 꿀벌에게도 심술이 났습니다.

바람처럼 꿀벌처럼 혼자 노는 게 싫었습니다.

제 색 짙은 꽃잎은 소년의 꽃이어야 하고

그 은은한 향기는 소년의 향수여야 하고

변하지 않는 그 절개는 소년만의 우정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한 송이 꽃은 그래도 그렇게 그 자리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바람도 꿀벌도

하나 둘씩 또 여럿이 함께

여전한 꽃의 모습을 달리 보기 시작 했습니다.

바람도 꿀벌도

하나 둘씩 여럿이 함께

소년처럼 심술을 닮아갔습니다.

한 송이 꽃은 침묵했습니다.

소년의 마음도

바람의 마음도

꿀벌의 마음도

또 여럿인 모두의 마음들이 사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소년 둘이는 참지 못 하였습니다.

한 송이 꽃은 바라만 보아야 합니다.

만져서 꺾으면 그 가시에 다치게 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철없는 소년은 설마 설마 망설이다가

꽃도 가질 수 있고

다치지 않을 자신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한 송이 꽃에게는

거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야하는 몫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소년 둘이는 꽃만 꺾은 게 아닙니다.

뿌리째 뽑아 옮겨 가지려다가 줄기 전신에 상처를 내고 말았습니다.

 

소년 둘이는 도망을 갔습니다.

꿀벌도 바람도 영문을 모른 채 푸두득 도망을 칩니다.

거기 그 자리에 꽃 보러 왔다가 발길질만 하고 갑니다.

 

파 헤쳐진 뿌리가 다시 새 뿌리를 내릴 때까지

새 뿌리에서 물이 오르고 새 줄기가 돋을 때까지

새 줄기가 자라서 새 꽃을 피울 때까지

새 꽃이 피어서

바람이 오시고

꿀벌이 오시고

여럿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꽃은 기도합니다.

도망간 소년들에게 상처가 더 클 것이라는 것을!

빨리 어서 빨리 그 상처가 아물기를 기도합니다.

꽃이 소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어서

자기만의 색과 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냥 그 자리 그대로 뿌리 내리게 가만히 두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뿌리째 뽑혀버린 꽃에게

고운 꽃잎과 향기로운 향기가 어디로 갔느냐고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시들은 꽃잎을 펼치라 하고, 없는 향기를 뿜으라 하고.

 

꿀벌에게도 바람에게도

소년에게도

꽃이 말합니다.

잊어버리라고.

잊어버려야 한다고!

모두 잊어버려야 꽃이 제 할일을 찾을 수 있다고.

자꾸 찾아와 헤집어 놓으면

영원히 뿌리 내리지 못해 죽을 수도 있다고!

 

뿌리를 내릴 때까지

줄기가 자랄 때까지

꽃이 필 때까지

그 아픔은 꽃의 몫이라고.

그 서러움은 꽃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다음에는 아픈 만큼 더 짙은 향기와 더 고운 꽃으로 피어날 거라고.

 

ㅡ<화답송>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시편22.4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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