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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용기를 내어라'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5-05 조회수637 추천수2 반대(0) 신고

 <용기를 내어라>(요한 16,29-33)

  - 유 광수신부-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얼마 전 중국 비행기가 김해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유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 때 어느 유가족이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라고 울부짖는 것을 보았다. 왜 우리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라는 이 울부짖움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치지 않고 던지는 질문이다. 그렇다고 누구하나 속시원히 해답을 해주지 못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예 내놓고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신다. 얼마나 고맙고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용기를 내어라."라는 말은 부모가 실의에 빠져있는 자식에게 하는 말이며, 스승이 시험에 실패한 제자에게 하는 말씀이며, 웃어른이 절망에 빠져있는 젊은이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여러분들은 언제 누구에게 이런 말을 들어보았는가? 정말 살기 힘든 요즈음 지나가는 말이라도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시는 분이 내 곁에 있다면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맙게도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아무튼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누구나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있다. 이유야 어디에 있든 인간이면 누구나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아무리 아무 걱정이 없이 잘 지내고 있는 집 같이 보여도 가까이에서 그 집을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말 못할 한 두가지 고난을 갖고 있다. 개인이건 공동체이건 모두 마찬가지이다. 고난의 종류도 하도 다양해서 불교에서는 백팔번뇌라고 했다. 즉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의 수가 108가지나 된다는 것이다. 고난을 겪고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의 현주소이다. 누구도 이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고 헤메이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고해 (苦海)라고도 하였다. 즉 인간은 고통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고난이 없는 곳에 살려고 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을 것이다.


그럼, 인간은 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이 고통은 어디에서 왔는가? 석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하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고민해보았을 것이다.  왜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성서는 그 원인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여자에게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라고 물으신 후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창 3,16) 그리고 아담에게는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창 3,17)


성서는 인간의 고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원래 하느님은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셨다. 그러나 그 행복은 인간이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 것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행복을 박차버린 것이다. 마치 자식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집을 박차고 나갔을 때 그 때부터 고생을 하게 되듯이 에덴 동산에서 살기를 스스로 버린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집 떠나면 고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떠난 인간, 하느님이 마련해주신 행복의 보금자리인 에덴 동산을 박차버린 인간, 그것이 모든 인간이 고통을 겪으면 살아야하는 이유이다. 집 떠난 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고난을 겪어야 하듯이, 부모의 품을 떠난 어린 자식이 부모의 품에 안기기까지에는 고난을 겪어야 하듯이, 인간의 고난은 하느님의 품에 안길 때 그리고 행복의 보금자리인 에덴 동산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누구나 이 고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띠노는 "주여,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나는 늘 불안했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가? 승리할 수 있는가?
나는 언젠가 장례예식장에 간 적이 있었다. 고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크게 고통을 겪고 있는 상주가 되는 큰 아들과 말을 나누었다. 큰 아들이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는 저희들에게 산이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고인이 된 아버지의 존재가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었던 가를 느낄 수 있었다. 산이신 아버지는 자녀들이  힘들 때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고, 안식처가 되고, 든든한 보호자가 되신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자식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아버지한테 큰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으리라. 우리에게도 산이 되어 줄 수 있는 든든한 아버지가 있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비록 삶이 고생스럽고 힘들더라도 아버지가 지켜 주시기에 다시 힘을 얻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편에서 "하느님은 나의 반석 나의 성채 내 구원자시오니, 내 주여 이 몸 숨겨 주시는 바위여 나의 방패 내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시여."(시편 17,3)라고 불렀다. 산이신 아버지가 계실 때 자녀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고 안식처가 되었듯이 고난을 겪는 이 세상에서 나의 성채, 구원자, 반석이신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된다.

그러면 나를 받쳐주시는 든든한 산성이시오, 피난처이시며 성채이신 하느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 하느님 안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가? 어디에서 "용기를 내어라.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해주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오늘 우리에게 든든한 산, 나를 숨겨 주시는 바위, 피난처, 산성, 성채이신 하느님은 바로 말씀이다. 자식이 아버지의 말을 신뢰하고 의지하듯이 우리가 굳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용기를 내어라."고 격려 해주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야훼님의 소리는 우렁차시다, 야훼님의 소리는 장엄도 하다. 야훼님의 소리가 삼목을 부러뜨리고, 야훼님의 소리가 레바논의 삼목을 부러뜨리고, 송아지처럼 레바논을, 들송아지처럼 사론을 뛰게하시다. ... 야훼님이 당신 백성에게 힘을 주시리라, 주께서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 야훼님이."(시편 28,4-6.11) 라고 시편작가가 외치는 우렁찬 야훼님의 소리를 말씀에서 들어야 하고 그 하느님을 말씀에서 만나야 한다. 우리가 말씀에서 그 우렁찬 야훼님의 소리를 들을 때만이 "젖 떨어진 아기"(시편 130,2)와 같이 평화를 얻을 수 있으리라. 세상을 이길 수 있으리라. 고난 가운데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으리라.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 28-3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모른다. 아무리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산 넘어 산이라고 고난이 없는 곳이 없다.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통해서만 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이긴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어차피 고난을 겪어야할 세상이라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
물 속에 빠져 죽지 않으려면 수영하는 법을 배워야 하듯이 고난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승리자가 되는 길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다. 우리가 승리하는 길은 승리자이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걷는 것이다. 그 길이 승리자가 걷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지혜롭고 현명하게 그 고난을 극복하며 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힘은 믿음에서 나온다. 그들의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그 지혜는 말씀에서 배운 것이다. 말씀이 바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이 있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하는 그 지혜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는 한 우리는 늘 고난 속에 파묻혀 살 것이고 고난에 짓눌려 살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고린후 4, 8-11)

 

우리가 일상 생활에 힘이 들고 지쳐있을 때 산에 올라가 맑은 공기를 마시고 다시 기분 전환을 하듯이 고통 중에 있고 절망 중에 있을 때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을 들으면서 다시 힘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목마를 때 산의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로 목을 적시듯이 우리의 삶에 메마르고 건조함을 느낄 때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말씀을 마시면서 갈증을 풀어야 한다. 늘 자식을 지켜주던 아버지의 존재는 한계가 있지만 나의 피난처, 굳센 바위, 휴식처이신 하느님이신 말씀은 영원하시며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내가 필요로 할 때 늘 내 곁에 계셔주시는 하느님이시다.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이 있는가? 나는 어떤 말씀을 생각할 때 내 안에서 힘이 솟구치는가?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되는가?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은 고난이 무서워서 피하는 믿음인가 아니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믿음인가?

 

예수님은 오늘 또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고난을 겪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여, 용기를 내어 일어납시다. 당신은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이겼고 당신은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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