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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15주일 2010년 7월 11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09 조회수448 추천수2 반대(0) 신고

연중 제15주일    2010년 7월 11일 


루가 10, 25-37.  신명 30, 10-14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시면서 발생한 이야기입니다. 율법교사는 유대교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합니다. 그는 무엇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은 그분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서에 어떻게 되어 있느냐고 다시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구약성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레위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 갔습니다. 드디어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강도 맞아 반쯤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하고,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 가 간호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간호를 부탁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약속도 합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은 불쌍한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다음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는 율법 교사의 말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 교사의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사랑해야 하는 대상인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예화에 나온 사마리아 사람 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는 성전에서 성무(聖務)를 하는 사람입니다. 레위는 사제를 도와서 역시 성전의 성무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일한다고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성전과 율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인간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지침 조항들입니다. 성전과 율법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출애 33, 19)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리는 건물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사람들이 실천하도록 하는 지침 조항들입니다.


사제와 레위는 하느님을 섬기는 직업을 가진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은 그들의 상상이 만든 하느님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하느님이 엄하게 벌하신다고 가르치면서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벌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은 사람을 돌보아주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사제와 레위가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아주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사마리아 사람은 성전과 율법에 대해 모릅니다. 그는 강도 맞아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는 그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성전과 인간이 만든 율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유대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원초적 체험, 곧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 시대의 성전과 율법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하지 못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우상이 되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는 분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실천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 34).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당신의 삶 안에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치고 살리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3, 35).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해서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부모는 최선을 다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문자의 계약이 아니라 영의 계약입니다. 문자는 죽이지만 영은 살립니다.”(2고린 3,6). 사랑은 문자인 율법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입니다.


문자는 죽입니다. 성전과 율법에 충실한 오늘 복음의 사제와 레위는 초주검이 된 사람을 버려두고 갔습니다.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고 살리라는 말은 율법의 문자에 없습니다. 이렇게 문자는 죽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모르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아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그를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 해 그를 살렸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율법이나 신심행위와 같은, 우리가 계획하여 하는 일 안에, 우리 계획의 산물로 살아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선한 마음 안에 살아계십니다. 자비와 가엾이 여김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신명기는 말합니다. ‘말씀은 하늘에 있지 않다...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다.’ 불쌍히 여김과 가엾이 여김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도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면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 되어 삽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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