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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집트 피라미드 (Egypt pyramid)
작성자최익곤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31 조회수523 추천수6 반대(0) 신고
 
이집트 피라미드(Egypt pyramid)


피라미드 (pyramid)

돌이나 벽돌로 만들어진 사각뿔모양의 건조물. 고대이집트를 대표하는 건축 양식이며, 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멕시코 등 세계 각지역에서 건조되었다.

사각뿔모양의 석조건조물로서 왕무덤으로 사용되었다. 이름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어원에 대해서는 고대이집트어의 기하학용어 페르 엠우스(per-em-us;우스로부터의 수직선), 또는 그리스어의 모양이 비슷한 과자 이름에서 기인하였다는 등 여러 학설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고대이집트어 이름은 메르(mer)로서 상승 또는 높은 곳을 뜻하였다. 처음에는 왕의 무덤으로 건조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나중에는 왕족의 무덤으로도 축조되었다. 피라미드의 출현은 왕무덤의 독자적인 형태가 창출되었다기 보다는 파라오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확립되었음을 나타낸다





역사

피라미드 형상은 단번에 실현된 것이 아니고 몇가지 변천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이집트 선사시대는 죽은 사람을 묻고, 그 위에 토사(土沙)로 둔덕을 만들어 덮는 매장법이 있었다.

BC 3000년 무렵부터 왕조시대에 들어오면서 마스타바(의자형 무덤)가 왕무덤이 되었고 뒤에 벽돌로 된 상부구조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구조도 견고해졌는데, 이것은 지하의 매장실을 보호하고, 무덤의 존재를 나타내며, 죽은 사람을 위해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한편 하부구조는 차츰 암반 속에 방을 만드는 형태가 생겨나고, 또 묘실에 넣은 음식물용의 돌항아리가 존중되어 돌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피라미드 건조의 전성기는 기자의 3대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고왕국시대로서 규모나 기술면에서 최고 수준을 나타내었으며 일명 피라미드시대라 불리고 있다. 현재 알려진 80여 기의 피라미드는 대부분이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 서쪽의 사막지대 동쪽 끝 아부·로아슈에서 기자·사카라를 거쳐 메이둠에 이르는 피라미드지대에 집중되어 있다. 중왕국시대에는 화이윰지방이나 테베에도 보인다.






구조

왕의 미라를 보호하고 껴묻거리[副葬品(부장품)]를 안치함과 동시에 현세에는 신의 화신으로서 우주질서를 스스로 유지하고, 죽은 뒤에는 신들의 일원으로서 이것을 보증하는 존재가 되는 파라오를 위한 공양과 제의(祭儀)의 장으로 피라미드 북쪽에 장제전(葬祭殿;上神殿)이 건조되고, 동쪽에 세드제(祭)를 행하는 신전·소신전·중정(中庭)이, 남쪽에는 제단이 있는 대중정이 축조되고 이것들을 높이 10m, 동서 277m, 남북 545m의 직사각형의 주벽(周壁)으로 둘러 장대한 무덤을 형성하였다. 하부는 지상 건축물보다 먼저 만들어졌는데, 지하 27m 되는 곳에 왕의 미라를 넣은 7㎡의 널방[玄室(현실)] 외에 조상(彫像)을 넣은 특별실, 공물(供物)·껴묻거리를 넣는 많은 방, 이것을 잇는 복도, 왕의 활동을 묘사한 벽면의 부조 등이 상부의 피라미드보다 먼저 암반 속에 만들어졌다. 상부는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남북축의 한 변 545m, 다른 변 277m, 높이 10m의 직사각형 위벽(圍壁)이 세워졌고 위벽 안에 신전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이 세워졌다. 그리고 위벽은 이집트왕권의 상징인 뱀의 조상으로 장식되고, 14곳에 들어가는 문이 있었으나 13곳은 열리지 않았고 1곳만이 입궐용으로 여닫게 되어 있었다. 이 피라미드 복합체를 둘러싸고 왕비의 소피라미드, 왕족·귀족의 마스타바가 질서있게 배치되어 현세의 국가질서를 내세에 투영하고 있다.





기원

최고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서 발견된 제3왕조 2대 왕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하였다. 처음에는 밑변 62.9m, 높이 8.3m의 사각형 마스타바 중앙에 깊이 28m의 구덩[竪穴(수혈)]을 파고 그 밑에 매장실을 만들었다. 그 다음 5차례 증축공사를 하여 올라갈수록 상단이 작아지는 마스타바를 6단 포개놓은 모양의 밑변 109×126m, 높이 62m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완성하였는데, 피라미드의 원형이 여기에 나타났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헬리오폴리스를 중심으로 예로부터 있던 태양신 숭배가 피안(彼岸)의 신앙과 결부된 결과로 계단은 태양의 아들인 국왕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길이라 생각할 수 있다. 동서축의 변을 길게 한 것은 남북축의 변을 길게 한 초기 왕조의 마스타바와 대조를 이루는데, 태양신의 교리에 따라서 동서축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이다. 태양신과의 결부는 뒤의 진정(眞正) 피라미드의 출현으로 한층 긴밀해졌다. 조세르를 계승한 세켐케트는 사카라에, 다음 왕 카바와 그 다음 왕 네브카는 자위에트 엘 아리안에 각각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제4왕조

제4왕조에 들어서자 장제전은 피라미드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옮겨지고 사막가에 새로이 하곡신전(河谷神殿)이 만들어져 양자는 참배로로 이어졌다.

제4왕조를 연 스네프루의 아들 쿠푸왕은 카이로 남서쪽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는데, 조형(造形)·천문학·기하학·건축 등 최고 수준이었다. 이것은 대(大)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4.6m, 밑변 230m, 경사면 각도 51°52′으로서 밑변을 기본방위에 합치시켜서 쌓았다. 이 피라미드는 평균 2.5t의 석회암을 230만 개 쌓아올린 것으로 계산되는데,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가장 큰 것이 5°30′으로 극히 정교한 것으로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이다.

축조방법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학설이 있으나, 오늘날에는 메이둠과 다흐슈르에서 비탈길 자리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피라미드의 1변에 직각으로 향하는 비탈길을 이용하여 돌을 운반하였다고 하는 학설이 일반화되어 있다. 독일 고고학자 R. 보르하르트에 따르면 축조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하는데, 북쪽의 하부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통로를 따라 내려가면 암반 밑에 설치된 미완성의 지하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계획의 매장실이며 제3차계획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한다.

상승복도와 수평복도의 교차점에서 위를 향하여 높이 8.5m, 길이 48m의 큰 복도가 시작된다. 그 끝에서 수평통로가 되고, 4짝의 문빗장 장치를 거쳐 왕의 방으로 들어간다. 왕의 방은 5.2m×10.45m, 높이 5.8m인데, 천장은 각각 50t의 무게를 가진 9장의 화강암으로 덮여 있다. 방의 북쪽과 남쪽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것은 왕을 따라 순사(殉死)하는 측근과 사제가 공기를 얻기 위한 구멍이었다는 설과, 천체관측을 하기 위한 시설이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오늘날에는 해명되지 않은 특별한 종교상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대피라미드는 부속건물을 가지며, 동쪽에 상신전이, 멀리 떨어져서 하신전이 있어 그것들 전체가 피라미드복합체를 이루고 있다. 피라미드가 두 신전을 갖춘 것은 이때부터이다. 또한 대피라미드 동쪽에 왕비를 위한 소피라미드가 있는데, 왕비가 피라미드를 가진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카프레왕 또한 제2피라미드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피라미드를 기자에 세웠다. 밑변 214.5m, 높이 143.5m, 경사면 각도 53°7′으로서 경사면각도가 크고 피라미드의 터가 대피라미드 장소보다 높이 있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대피라미드보다 높다. 제2피라미드는 정상부에 외장석재의 일부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으며 상·하 신전 외에 대스핑크스를 피라미드복합체 안에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석회암 언덕에 직접 조각한 사람 얼굴의 사자상으로 무덤의 수호자로서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의 북쪽에 엎드려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고 있어 태양신앙의 또 하나의 상징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기자에는 멘카우라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작은 피라미드 6기가 있다.






제5왕조 이후

제5왕조나 제6왕조의 왕들도 아부시르·사카라 등에 피라미드를 축조하였으나 규모에서 제4왕조의 것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규모가 작아진 대신 신앙상의 배려가 더해져, 제5왕조의 우나스왕, 제6왕조의 페피 1세·메르엔라·페피 2세의 피라미드에는 매장실 벽면에 신의 업적을 찬양하고 왕의 저승길 안전을 기도하는 기도경문, 즉 피라미드텍스트가 나타나 있다. 피라미드텍스트는 예로부터 신앙의 집대성이었으며, 여기에 태양의 아들로서 왕의 지위가 명문화되고, 태양으로 귀일(歸一)하는 승천의 길로서 배·빛·계단이 나타나 있다. 제3왕조부터 제6왕조까지 전성기를 맞았던 피라미드 축조는 제7왕조의 이비왕을 마지막으로 일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제11왕조에 이르러 다시 나타났다. 제12왕조의 6명의 왕은 저마다 상당한 규모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는데, 리슈트에 있는 아메넴하트 1세·센우스레트 1세, 일라훈에 있는 센우스레트 2세, 하와라에 있는 아메넴하트 3세 등의 피라미드가 유명하다. 특히 센우스레트 1세의 피라미드는 밑변 105m, 높이 61m, 경사면 각도 49°로 비교적 대형인데 둘레에 왕비·왕족을 위한 10기의 소피라미드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후에도 제13왕조∼제17왕조까지의 혼란기에 4개의 소피라미드가 만들어지고, 피라미드 건조가 끝났다. 말기 왕조시대에 누비아의 여러 왕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하였으나 규모·재질·구조면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는 비교가 안된다. 현재 이집트에는 81기의 피라미드가 있다.





건축양식
피라미드신전의 건축양식은 마야문명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꼭대기의 신전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주로 기단부의 특징을 가지고 분류한다. 먼저 평면의 형태를 보면 사각형, 원형, 사각형과 원형의 혼합 또는 크고 작은 사각형을 조합한 것 등이 있다. 그리고 하나 또는 복수의 계단이 신전부를 향해 놓여져 있다. 계단에는 양쪽에 두드러진 부분이 붙여져 있기도 하고 석조로 장식한 것도 있다. 피라미드 외면의 형태 특히 벽면의 형태도 중요한데 거기에는 단순한 수직 또는 경사면에서부터 기이한 형상의 벽이라든지, 여러 가지 복합된 벽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테오티와칸문화의 타루·타프레로방식의 벽이 복합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다양한 조합을 보인 복합벽이 각지에서 만들어져 프레스코화 등에 나타난 장식이 칠해진 것도 있다. 그리고 기단부 전체의 형상으로서는 계단모양의 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이러한 건축양식은 토기형식 등과 함께 시기나 문화의 전파를 알려주는 중요한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북아메리카에는 미시시피강유역에 큼직한 흙무덤을 쌓는 습관이 있었는데 피라미드가 많이 만들어진 곳은 메소아메리카(중앙 아메리카)와 중앙 안데스지역이다. 일반적으로 메소아메리카의 피라미드는 천체관측소나 무덤 등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신을 맞이하는 장소, 즉 공희(供犧)·예배가 이루어지는 신전의 의미가 강하였다. 그러나 마야문명 고전기 팔렝케의 <법률의 피라미드>에서 볼 수 있듯이 피라미드 내부에 고위 신관(神官)이나 왕을 매장한 것도 있다. 이 피라미드신전 건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멕시코의 올멕문명의 중심지 라벤타 및 그 밖의 곳에서 만들어진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대략 BC 1000년 무렵으로 짐작된다. 이 지역 피라미드신전은 라벤타의 피라미드에서 나타나듯이 밑바닥 위에 점토를 굳혀서 만든 원뿔모양의 건물들로서 여기에서 메소아메리카의 도시문화가 시작되어 16세기 에스파냐 침입 때까지 도시의 중심을 이루어 석기시대의 기술을 지닌 다채로운 건축미를 자랑하였다.




구조
기단부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신전부로 나뉜다. 기단부 내부는 팔렝케의 <비명(碑銘)의 신전> 내부에 만들어진 석실 등이 있다. 재료는 흙·돌 및 햇볕에 건조한 연와(煉瓦) 등이 사용되었다. 그 중에는 기단내 석벽이나 햇볕에 말린 연와로 작은 블록을 만들어 강도를 고려하여 메운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단순한 매립으로 되어 있다. 기단부 외면은 단순히 나누어진 돌을 쌓아 올린 것, 반듯하게 자른 돌을 사용한 것, 불에 가한 연와를 사용한 것, 흙을 그대로 사용한 것 등이 있으며 그 위에 화장을 하여 다듬은 것도 적지 않다. 신전부는 흙이나 돌로 벽을 만들고, 상부구조에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천정과 지붕의 보존이 좋지 않지만 신전모형이나 회문서(繪文書)에 있는 정도의 복원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반면 마야문명에는 신전전체가 돌로 축조된 아치공법이 사용되어 보존이 양호한 예도 있어 지붕의 상부에 만들어진 용마루장식의 위치나 형상으로 미루어 지역적 특징을 알아낼 수 있다. 메소아메리카의 피라미드신전은 멕시코 중앙고원 쿠아코일코에 석조 피라미드가 나타나고, 기원 전후 발달한 테오티와칸의 종교도시에는 해·달·케찰코아틀 신들에게 바친 거대한 피라미드가 계속 만들어졌고 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태양의 피라미드>로 밑변 약 225m, 높이 65m나 된다. 또한 테오티와칸의 영향을 받은 몬테알반·카미날후유 등에도 피라미드군이 형성되었다. 멕시코만지방 엘타힌에는 많은 벽감(niche)으로 장식한 특이한 형태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졌으며, 그 뒤 톨텍문화·아스텍문화에 계승되었다. 특히 아스텍의 중심지 테노치티틀란(지금의 멕시코시티)과 틀라틸코·초룰라 등지에 건설된 대피라미드는 정복자인 에스파냐인들도 경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안데스지방에서 피라미드의 발달은 주로 고전기라 불리우는 기원 전후에서 수백 년의 문화개화기 이후로 한정되어 있는데, 페루 중부 해안인 라스알다스에서 초기 농경기의 벽돌로 쌓은 피라미드가 적지 않게 만들어졌으며, 본격적인 진흙 벽돌로 쌓은 대피라미드의 구축은 모치카문화를 중심으로 한 페루 북부해안에서 이루어졌다. 같은 시기 남안데스의 타아와나코문화에서도 흙을 쌓아 올린 피라미드가 나타났으며, 석조 피라미드는 거의 볼 수 없다. 또 최후의 잉카기에는 피라미드가 별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해안지방인 파차카마크의 대신전이 있을 정도이다. 안데스의 피라미드도 그 정상에서 공희·예배가 거행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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