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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 중심의 삶 - 2013.8.28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28 조회수448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3.8.28 수요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354-430) 기념일

1테살2,9-13 마태23,27-32

하느님 중심의 삶

오늘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는 성녀 모니카의 축일에 이어

오늘은 그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노 축일입니다.

모자가 성인입니다.

 

아침성무일도를 보던 중

즈가르야 노래 후렴과 성모의 노래 후렴이 깊고 아름다워 나눕니다.

‘주여, 당신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하셨나이다.

당신 안에 쉬게 될 때까지는 우리 마음이 평온치 못하리이다.’

‘옛것이나 항상 새로운 주님의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주님은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게 하셨나이다.’

모두 성인의 불후의 명저 고백록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우리 수도승들처럼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사셨던 성인이심이 분명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저절로 끊임없이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며칠 전 어느 수도형제 모친의 장례미사에 참석했다가 제의 방에 놓여 있던

영어로 쓰여 진 글귀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사제여,

오늘이 처음미사이자 마지막 미사처럼, 유일한 하나의 미사처럼 봉헌하라.’

(성 프란치스코).

어제 읽었던 어느 사막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오늘 너는 태어났고, 오늘 너는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했다.

내일은 떠나는 나그네처럼 매일을 그렇게 살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루하루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환상이 걷힌 삶의 기본에 충실한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역시 1독서의

바오로 일행과 율법학자들 및 바리사이들의 생활자세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오로 일행은 분명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난 분들이었습니다.

가르침의 내용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삶이 이를 입증합니다.

기도와 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던 아주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노동을 통해 현실에 깊이 뿌리내린 건강한 삶이요 환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복음 선포였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이 증인이십니다.”

얼마나 확신에 넘친 삶인지요.

보고 배웁니다.

이런 언행일치의 삶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다음 말씀에서 보다시피 바오로 사도 일행은 또한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노동과 기도와 말씀으로 살아갔던 바오로 일행이었고,

이들의 복음적 삶에 감화된 테살로니카 신자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바오로 일행처럼

기도와 노동, 말씀이 균형 잡힌 삶이요,

환상은 사라져 아주 본질적인 내적일치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떠날 때 환상 안에 삶이요,

내적분열에 표리부동의 위선적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러합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고,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합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역설적으로 그 악행을 반복합니다.

이 또한 오늘날 우리 종교인들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불교의 자승 총무원장 연임을 반대하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에 속한 적명스님의 인터뷰 한 대목과

성명서 일부 내용입니다.

가톨릭의 수행자들인 우리 수도승들에게도 큰 가르침입니다.

“불교계에 퍼져있는 부정부패의 근원은 명백합니다.

속된 말이지만 ‘돈’입니다.

부정부패를 추방하려면 딱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스님들로 하여금 돈에서 멀어지게 해서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가 도(道)에 게을러지면 삶이 향기롭지 못하고,

출가 사문이 명리(名利)를 탐하게 되면 수행자로서 생명이 단절되는 것이다.

슬프다!

오늘날 조계의 후학들이 이사판(理事判)을 막론하고 도(道)에 철저하지 못하고

명리에 휘둘려 견성도생(見性度生)의 종지(宗旨)를 잃어버리고,

서로 다투어 토각귀모(兎角龜毛: 토끼의 뿔과 거북이의 털. 불교계에서 흔히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사용하는 비유 중 하나)의 허상을 향해 치닫는 모습이 마왕 파순(波旬)의 자손을 방불케 하고 있다.”

오늘 날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수행자들에게 주는 죽비 같은 가르침입니다.

흡사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주는 가르침 같기도 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과 불통일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의 빛깔과 향기로 살게 하십니다.

“당신 숨결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시편139,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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