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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49) 각하께 써 보내 드리는 것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31 조회수506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4년1월25일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 없음 ㅡ느헤미야8,2-4ㄱ.5-6.8-10;고린도1서12,12-30;루가1,1-4;4,14-21ㅡ

 

       (49) 각하께 써 보내 드리는 것

                                 이순의

                            


ㅡ이 시간ㅡ

복음은 루가가 써야 할 내용들의 신빙성을 먼저 정중하게 밝힘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기록들이 사실임을 전하고자 한다. 다른 곳도 아닌 예수님께서 반드시 이름 앞에 붙이고 다녔던 나자렛이라는 마을에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다. 나자렛 사람 예수를 소개하면서 굳이 목수인 아버지를 도와 인생의 거의 전부를 나자렛에서 성장해 온 그 마을에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고향이라는 곳은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지를 않는가?! 그런데도 아주 정중한 격식을 갖추어 주님을 소개하고 있다.

 

묵상 글을 쓰면서 루가의 심정을 미세하나마 감흥 할 수 있을 것 같다. 묵상 글은 분명히 다르다. 문학상에 도전 할 때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시와 수필과 소설을 쓰면서 문학상에 도전을 할 때는 한가지나 몇 가지도 되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몇 날 밤을 지새우며 작업을 한다. 독자에게 호소력이 있는지? 문학성에 충분할 만큼의 기교와 작품성이 있는지? 문법적으로는 얼마나 감점이 따를지? 뭐 별 생각을 다하면서 대 작업을 한다. 그것이 진실이 아닌 허구라 해도 상관이 없다. 문학은 사실 보다는 작품성에 더 큰 반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묵상 글은 너무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며, 또한 책임 있게 쓰고자 노력하고 있다. 첫째는 그 날의 말씀을 충분히 묵상해야 한다. 말씀을 도외시한 묵상 글을 쓸 거라면 차라리 글쓰기의 귀재들끼리 어울리는 창에 가서 기웃거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말씀을 일상 안에서 생활화한 묵상이 아니라면 묵상 글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둘째는 일상이 묵상화 되어야 한다. 일상이 묵상이어야 되는 것은 당연히 주변의 사건과 인물들이 연관되는 소재를 복음적으로 살아야 되고, 그 삶이 문장으로 연결 되어야 한다. 이는 상당한 압박감과 소재의 고갈을 가져 올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복음이 삶으로 연결 되지 못하고 가상적 드라마를 묵상 할 수 있기 때문에 체험적 묵상을 외곡 할 위험이 따른다. 그러므로 일상을 묵상 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언제나 진심이어야 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뿐만 아니라 인간적 갈등과 고뇌, 그리고 번민과 노여움까지도 나의 진심이어야만 묵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희망과 기쁨, 사랑까지도 가식의 묵상을 써야 한다면 그것은 묵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봉헌도 아니며 기도도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로 나는 나만의 진솔함을 써야 한다. 나는 사제도 수도자도 아니며 신학자는 더욱 아니다. 또한 문필가도 아니기에 누구를 모방하고자 해서 모사가 가능한 귀재도 아니다. 그렇다면 투박하면 투박한 대로, 예민하면 예민한 대로, 구린내가 나든 향수 내가 나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봉헌해야 하는 것이다.

 

묵상 글을 쓰면서 내가 주님께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또 한 가지! 누구나 다 겪어 본 인생살이를 복음 안에서 묵상함으로써 민초들의 희로애락을 동행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때로는 공감하면서! 때로는 원망하면서! 때로는 통회하면서! 또 때로는 절절한 전율을 느끼면서! 우리네 변변찮은 삶이 복음 안에서 신비롭게 인도되고 있다는 믿음을 나누고 싶다.

 

그러나 루가 복음사가께서 미리 밝히신 "그 일들을 글로 엮는 데 손을 댄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라고 하신 것처럼 나도 내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이 나를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묵상 글의 소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가장 먼저 조심스러운 분들은 그 분들이다. 나도 그분들께 이 지면을 통해 심심한 양해를 구하며, 그로인한 나의 지역적인 익명성과 사사로움의 명칭들을 부득이 생략하고자 하는 이유를 밝힌다.

 

묵상 글을 쓸 때는 미리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날의 말씀을 읽으면서 독서나 복음과 연관된 내용을 최근의 일상 안에서 찾아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혹은 과거의 먼 추억을 되돌리거나 상처를 들출 때는 내용의 사실성에서 작은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나의 상처가 상대편에게는 아무런 원의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미완성의 어리석은 한 인간으로서 일상을 묵상한다는 것은 대단한 숙고가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더욱 주님께 묵상 글에 대한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또한 묵상 글을 통하여 철저한 알몸인 나를 발견하게 되고, 내가 아파했던 것들에 대해 진솔한 자아를 열어 가기 시작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있기에 일상을 묵상하는 것이고, 일상을 묵상 할 수 있기에 진솔한 삶을 봉헌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가족과 나를 알고 있는 많은 친지들과 지인들께 부끄럽지만 진심을 글로 엮고 싶다. 다만 인간성의 한계 안에서 고뇌하는 부족한 나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나, 주님께서 쓰실 때는 의미가 크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너무나 빤한 일상을 묵상이라고 나열해가는 어리석은 글들로 인하여 누군가가 희망을 느낄 수 있다면 나의 희망뿐만 아니라 그분의 희망조차도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2천 년 전의 복음사가들이 그리스도를 알리려고 그토록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면 동양이라는 이국의 아줌마인 내가 감히 주님을 믿는다고 말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도 그들이 남겨주신 글들을 읽으며 나의 일상 안에서의 작은 축복들을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작은 축복들로 인하여 삶의 풍요와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대궐이 아니라도 행복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 당신 때문이다.ㅡ아멘ㅡ

 

ㅡ그들이 쓴 것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 그대로입니다. 저 역시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 둔 바 있으므로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각하께 써 보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루가1,2-3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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