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유 [기적 때문으로 답하지 않는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06 조회수448 추천수0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유다인들의 율법시대 아래에서 병자들은 천한 몸으로 살았습니다.

눈먼 두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주어진 육신과 영혼의 고통은 죄의 댓가로써 세속은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세속)으로부터 버림받는 비천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과연 눈먼 두 사람의 처지는 그들의 죄 때문일까요.

그들이 비천한 가운데서 육신과 영혼의 고통을 받는 것은 사람들의 냉대였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그들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세속의 무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천한 존재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 고통의 근저에는 세속의 죄,악스러운 배경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죄,악스러운 배경으로 인하여 눈먼 병자들은 육신과 영혼의 고통에 놓여집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눈먼 소경이 되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세속으로부터 비천한 버려진 존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인간 고통의 바닥에는 죄,악스러운 배경(원인)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세속은 그것을 (죄악스러운 원인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래서 더욱 버려집니다. 사랑의 힘이 없는 까닭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죄악스러운 원인(배경)들을 정화시킨다면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눈먼 두 소경도 사랑의 능력 아래에서 평화와 행복을 얻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이 비천한 존재로 - 버려지는 것은 그들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님에도

세속은 그들의 비천한 버려진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마치 

그들 자신의 타고난 운명 때문이다고 간편하게 생각합니다.

세속의 어떤 죄,악스러운 배경에 대해서는 부정해 버리고 맙니다.

어떤 죄,악스러운 배경 때문임을 여기지 않고 그들 자신의 문제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 고통은 멈추지 않는다 할 것입니다.

 

이같은 율법 아래의 시대적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나신 사랑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랑의 탄생이셨습니다.

왜 인간(세상)에게서가 아닌, 하느님에게서 사랑이 나셨을까요.

그것은 진정 사랑의 구세사 입니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랑(하느님의 사랑)을 사람 안에 탄생시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비천한 존재로 버려진 이들에게 인간 고통의 해방인 구원이었습니다. (구원적인 사랑)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라고 합니다.

율법의 정신을 망각한 죄,악스러운 배경을 가진 비정한 세속에서

눈먼 이들은 예수님의 자비를 외칩니다.

사랑이 없는 세속에서 사랑이신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의지합니다.

비천한 존재로 전락한 그들은 사랑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절실하게 애원합니다.

누구에게 이런 외침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시대에서도 이같은 외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운명으로만 취급해 버리고

인간 고통의 근저에 있는 죄,악스러운 배경의 정화에는 등한시합니다.

버려진 이들의 고통은 과연 그들 자신의 운명 때문일까요.

그들도 평화와 생명의 존중으로 행복하게 살 수 없을까요.

사랑의 힘(사랑의 능력)이 세속의 힘을 물리친다면 그들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했습니다.
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세속과 다른 [예수님의 사랑의 자비]에서 큰 믿음을 지닙니다.

 

사랑의 힘에서 무기력하여 - 죄,악스러운 배경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곳에서

사회로부터 (인간으로부터) 버려진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비천한 처지는

그들 자신의 육체적, 영혼적 고통 때문에 온전한 사랑의 자비를 누구보다도 더욱 간절하게 희망합니다.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따른 죽음이 없는 - 예수님의 평화와 행복을 참으로 갈망합니다.

 

눈먼 두 사람의 믿음의 힘은 -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서도 버려진 이들의 비천한 처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희망을 간직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은 눈먼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예수님의 구원 모습입니다.

 

세상의 세속은 예수님에게서 나타나신 사랑에 대한 참된 믿음에서

죄,악스러운 배경들은 사랑의 힘으로 정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 믿음의 힘이 없다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율법의 정신이 망각된 곳에서 처럼 믿음의 정신이 썩은 곳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과연 믿고 있는지를 예수님께서는 오늘에도 묻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

 

버려진 이들에거서 드러나는 악에 의한 고통과 죄에 따른 죽음의 비천한 처지는

그들 자신들이 타고난 운명적인 책임일까요.

아니면 사랑의 힘에 무관심한 - 세속의 냉대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고통과 죽음을 일으키는 

비천한 처지의 근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죄,악스러운 배경(원인)

때문일까요.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