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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30일 야곱의 우물- 요한 20, 19-31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30 조회수469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20,19-­31)
 
 
 
 
예수님을 잃고 실망과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사면초가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참하게 떠나셨는데 자신들은 제자의 도리도 못했고, 그것도 한솥밥 먹던 동기가 일을 이 지경에 이르게 했으며, 오늘 아침에는 예수님 시신까지 없어진데다 유다인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는 일뿐입니다. 절망과 공포, 죄책감으로 마음의 문까지도 꼭꼭 닫아걸었을 겁니다. 이 상태라면 그들이 받은 상처는 평생을 갈 것 같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19절) 히브리 말로는 “샬롬 알레켐!” ‘샬롬’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간단한 인사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평화는 각별합니다. 그들만큼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민족도 드물어서 아침저녁으로 평화를 비는 것을 인사로 나눌 정도입니다.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도 다름 아닌 평화였습니다. 꼭꼭 닫혀 있는 문을 통과하여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서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들의 공포는 눈 녹듯이 녹아내립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20절) 제자들의 기쁨은 두려움의 벽을 무너뜨립니다. 닫힌 마음의 문도 열립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두고두고 한참 갈 뻔한 상처도 금세 아물게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20절). 예수님의 상처는 승리의 표시이고 사랑의 표시입니다. 자랑스럽게 제자들에게 내보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확인합니다.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 흔적이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분의 상처에서 신앙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들은 다시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불신앙으로 두려움에 떨던 그들이 믿음을 되찾아 불안을 극복하고 닫힌 마음을 엽니다. 신앙은 소신과 확신을 펼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이 잠긴 문을 뚫고 제자들을 찾아오신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다시 한 번 그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을 파견하신 것과 똑같은 소명으로 내보내십니다. 예수님처럼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이제 제자들 스스로 예수님이 오시기로 하신 메시아이심을 전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무턱대고 거친 세상으로 내몰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22절) 성령으로 제자들과 그들의 공동체를 거룩하게 정화시키시고 힘껏 세상을 향해 나아갈 큰 기운을 불어넣으십니다. 성령은 예수님 대신이고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험한 세상에 성령만큼 큰 힘이 되어주실 분은 없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몬 세상을 용서하라십니다. 당장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할 일이 용서하는 일밖에 없다는 듯이 당장 용서를 실천하라십니다.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셨기에 꼬인 것부터 풀고 깨끗하게 시작하라는 말씀일까요?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선포하는 용서야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첫째 관문입니다.

때마침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25절) 예수님이 주신 평화로 들뜬 다른 제자들의 자랑에, 토마스 역시 직접 예수님을 뵙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직접 뵙지 못했으니 아직 불완전한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못 자국을 보고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소.”(25절 참조) 여드레 뒤 토마스까지 다 모인 날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또 찾아와 그들 가운데 서십니다(26절). “…보아라. …넣어보아라. 그리고 …믿어라.”(27절) 토마스는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우리의 처지를 대변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만질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이젠 만져지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예수님 몸에 집착할 때는 지났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토마스의 어두운 마음이 환히 열리는 순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임을 고백한 완벽한 신앙고백입니다. 여드레 뒤 두 번째 오신 날, 비로소 예수님은 확신에 찬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당부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보지 못할 때는 믿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때론 보이는 것이 믿음에 방해가 됩니다.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징은 그동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믿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표징은 버리고 그 실재를 바라봐야 합니다. 표징에만 머물고 표징에만 집착하는 것은 유치한 믿음입니다. 죽음의 강을 건너신 예수님의 부활이 그 실재입니다. 부활은 예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나눌 수 있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몇 번 더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와 함께 부활 행보를 계속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날이 예수님이 불어넣으신 성령에 힘입어 예수님처럼 살 준비를 갖추고,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31절) 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은 부활한 사람으로 사는 길입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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