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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8 토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1-27 조회수364 추천수1 반대(0) 신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1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2.8-19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조상들의 믿음

11장은 앞의 훈화의 끋부분에서 예시한 대로 믿음에 관한 장이다. 저자는 먼저 믿음의 특징을 밝힌 다음, 아벨에서 비롯하여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믿음의 위대한 조상들을 길게 열거한다. 등장 인물의 순서는 대체로 구약성서의 역사 순서를 따르는데. “믿음이라는 주제어가 후렴 형식으로 중간중간에 반복된다. 훈화는 크게 나누어 1-2절의 서론과 3-38절의 본론과 39-12, 13-16, 17-31절의 네 부분으로 나누인다.

 

11.1

1절에서는 믿음에 대한 본격적 강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 정의부터 내린다. 저자는 바오로와 같은 방법으로 현재의 것과 미래의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들어 믿음의 본질을 설명한다. 믿음에 대한 이 정의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단어는 실상근거. “실상은 본질, 실체, 보증, 확증,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확증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문장 내용으로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사물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실상이다. “근거는 논증, 증거, 근거, 아는 방법. 신념 등의 의미가 있다. 이 단어 역시 앞의 실상과 관련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근거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

 

2

하느님께서는 다음에 열거한 믿음의 조상들에게 당신 자신과 그 구원 계획을 알려 주셨으며, 조상들은 믿음을 통하여 그 계시를 받아들였다.

 

8

후기 유다인즘에서 시작하여 초기 그시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여겨졌다. 저자는 이러한 시대적 관념을 염두에 두고 8-19절에서 믿음의 길을 충실히 걸어간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그의 부인 사라의 이야기를 곁들이면서 전개한다.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의 성화가 꽤 길게 나오는데 저자는 그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이주의 종교적 의미. 곧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각시킨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났고, 이 순종은 그로 하여금 고향을 떠난 유랑인 및 이방인이 되게 했다. 그의 믿음과 순종과 유랑생활은 광야 여행을 한 이스라엘 백성과 지상 여행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표본이다.

 

9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계속 이방인으로 살았고, 이 생활은 그의 아들 이사악과 손자 야곱과 함께 계속되었다. 이사악과 야곱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후손이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도 약속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유랑생활은 약속의 땅에서도 계속되어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미래의 고향을 바라면서 계속 믿고 순종했다.

 

10

튼튼한 기초 위의 도시는 유다 랍비문헌이나 묵시문헌에 흔히 나오는 천상 예루살렘이다.

 

11

자손을 낳을 능력은 표현 자체로는 남자의 성적 능력을 나타내므로 아브라함에게 더 적합하지만 모든 사본이 사라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창세기에서는 또한 사라가 의심하면서 웃은 사실을 부각시키는데 여기서는 그 사실은 접어둔 체 사라를 성실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표상으로 내세운다. 이것은 이스라엘 성조들의 부인을 믿음과 덕의 모범으로 삼던 유다 신심을 따른 것이다. 믿음은 이렇게 사라의 경우와 같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사실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2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는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의 성서적 수어다. 저자는 이 수많은 후손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들어 있음을 암시한다.

 

13

13-16절에서는 잠시 아브라함 이야기가 중단되고 8-12절에서 말한 믿음의 종말적 의미를 더욱 깊이 설명한다. 성조들은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믿었기에 천상 고향을 기다리면서 기꺼이 나그네 생활을 했다. 이 천상 세계에 대한 약속은 이제 대제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곳에 들어가심으로써 실현되었다.

 

16

가나안 땅에 살면서 하느님이 약속하신 참된 고향을 발견하지 못한 성조들은 본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라던 곳은 더 나은 천상 고향이었기 때문에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하느님조상들의 하느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며, 그분의 영원한 이름이기도 한다.

 

17

17-19절은 13-16절에서 잠시 중단되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외아들이자 약속의 상속자인 이사악을 바쳤던 것은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었던 그의 투철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이기기 어려운 시험을 믿음으로 극복했다.

 

18

창세 21.12. 직역하면 이사악 안에서 너에게 후손이라 불릴 것이다”. 이 말은 이사악의 대를 잇는 후손이라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무엇이라도 하실 수 있는 분이며 죽은 사람이라도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사악을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도 로마 4.17에서 죽음 자를 살리시고 없던 것도 있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내세운다. 저자는 여기서 은연중에 이사악이 죽음의 경제에서 벗어난 사실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키고 있다.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예수님의 이적사화를 대별하면 사람을 구제하신 치유-구마이적사화와 자연을 상대로 하신 자연이적사화로 양분된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셨다는 소생이적사화 역시 시체라는 자연물을 상대로 하신 것이므로 자연이적사화에 속한다. 그런데 치유-구마이적사화는 대체로 역사적 신빙성이 있으나 자연이적사화는 신빙성이 없다는 게 신약학계의 통설이다.

 

4,35-41로 그 구조를 살펴본다면 치유-구마이적사화의 양식과 흡사해서 상황묘사, 기적적 구제의 말씀, 구제 실증, 목격자들의 반응 순으로 엮여 있다. 40절만은 제자들의 몰이해를 탓하시는 말씀인데 이는 이적사화 고정양식에 필요치 않은 소재일뿐더러 마르코의 지론인 비밀사상과도 잘 어울리는 까닭에 마르코 자신이 만들어 삽입한 것이다.

 

35

35-36절은 1,33-34절을 되새기면서 많이 손질했다.

 

37

요나 1.4 참조: “바다에 폭풍이 크게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38

요나 1.5 참조: “요나는 배 밑창으로 내려가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요나 1.6 참조: “선장이 다가와 그에게 소리쳤다. ‘이런 사람 보았나. 잠을 자다니. 당신도 일어나 당신 하느님에게 비시오, 혹시라도 하느님이 우리를 생각해 주시면 멸망하지 않을 것 아니오.’”

 

39

39ㄱ절은 구마이적사화에 나오는 귀신추방령과 흡사하다.

 

요나 1.15 참조: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성난 바다가 고요해졌다.”

 

40

40절은 제자들의 몰이해를 탓하는 말씀으로 마르코가 써넣은 것이다.

 

일부 사본에는 아직도 믿음이 없습니까?” 대신 어찌하여 믿음이 없습니까?”라 한다.

 

41

요나 1.16 참조: “그러자 사람들은 주님을 몹시 두려워하며 주님께 제사를 지내고 서원까지 했다.” 41절은 제자들의 반응인데 질문형 경탄사가 함께 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가?”데 대한 답변은 자명하다. 예수님은 요나보다 위대한 분이시다. 폭풍과 바다를 고요하게 하신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다! 누가 왜 이 이적사화를 꾸몄을까?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 교회나 이방계 그리스도 교회에서 전도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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