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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월 2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5-02 조회수754 추천수14 반대(0) 신고

            5월 2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요한 16장 20-23절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고통에 대한 의미 부여 작업>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이뤄내야 할 참으로 중요한 과제가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삶에 대한 의미부여’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에 대한 가치 부여’, ‘나란 존재에 대한 의미 추구’, ‘나 자신에 대한 존중과 예의’, 이것처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때로 별 의식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되는대로, 그저 닥치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단 한번뿐인 우리네 인생, 얼마나 소중한 나날인데, 그렇게 살아가서야 되겠습니까?


내 삶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 혹독한 고통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오늘 지고 가는 이 십자가에 대한 가치 부여가 아닐까요? 매일 밀물 밀려들듯 내게로 찾아오는 일상의 십자가에 대한 의미 파악, 이런 노력들이 내 인생에 대한 가치 부여라고 생각합니다.


고통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 한 가지는 내가 지금 견디고 있는 이 고통이 별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좁고 차가운 감방에서 혹독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목적이 뚜렷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희생이란 큰 목표가 있었기에 그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10달 가까이 뱃속에 들어있던 아이가 막 세상으로 나오기 직전 산모가 겪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통해 하느님의 축복인 고귀한 생명 하나가 탄생된다는 큰 이유로 인해 산모는 그 큰 고통을 기꺼이 견뎌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 순간 겪고 있는 고통이 하느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공동선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이웃을 위한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아무 가치 없는 무가치한 고통일 때, 그 고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이런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게 됩니다. 삶에 대한 기대도 사라집니다. 쉽게 삶에 대한 끈도 놓아버립니다.


반대로 지금 이 순간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아무리 극심하다 할지라도, 그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가 이루진다면, 신기하게도 그 고통을 극복할 힘과 용기가 생겨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할지라도 희망을 지니고 걸어가게 됩니다.


신비스런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무리 극심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 고통의 가치를 파악하게 되면 더 이상 그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은총으로 승화됩니다. 감사로 변환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큰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내고 계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왜 하필 나인가?’ ‘왜 유독 내 십자가만 이렇게 무거운가?’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큰 십자가를!’ 라며 힘겨워하시는 분들,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통 잠시뿐입니다. 우리의 이 고통, 견디고 견디다보면 어느새 축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죽을힘을 다해 감내해내고 있는 이 혹독한 슬픔, 머지않아 춤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이 끝도 없는 불행, 오래 가지 않아 언제 그랬냐 는 듯이 행복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감사’입니다. ‘찬미’입니다. ‘환호’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160번 / 하느님의 어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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