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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월말 태안반도를 장식한 일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5-01 조회수541 추천수4 반대(0) 신고
                  4월말 태안반도를 장식한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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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마지막 날이다. 4월을 장식했던 갖가지 봄꽃들이 어느새 이울더니, 4월마저도 이울고 있는 저녁 시각이다. 지난해 4월 30일 피붙이, 겨레붙이, 인연붙이들에게 보낸 '가족메일'을 일년 후 같은 날인 오늘 아침에 읽어보니 첫머리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어느새 4월이 이울고 있네. 4월은 찬란한 달이면서도 허무한 달임이 다시 한번 실감되네. 개나리와 목련, 벚꽃이며 진달래들이 눈부시게 피었다가 지고 만 4월의 끝은 무참한 기분마저 안겨주는 듯싶네. 찬란함과 허무함은 거의 같은 의미라는 생각도 드네. 원래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 아닌가 싶고…."

지난해 그렇게 왔다 간 4월이 올해도 그렇게 왔다가 가고 있다. 순환과 반복의 장엄한 섭리 속에서 올해 또다시 왔다가 금세 가버리는 4월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오늘도 바다엘 갔다 왔다(서울대교구 '가톨릭청소년회'에서 관장하는 여러 문화공간의 직원들 90여 명이 4분의 신부님과 함께 왔다). 올해는 4월을 거의 산야가 아닌 바다에서 지냈다.
 

▲ 할머니와 손녀 / 태안군 소원면 의향리 '태배' 지역의 '가르미' 해변에서 26일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기름제거 작업을 했다.  
ⓒ 지요하  재난봉사

나는 일년 중에서 4월을 가장 좋아한다. 4월을 왜 가장 좋아하는지는 아직 확실한 이유를 모르고 있다. 오랜 세월 4월을 각별히 좋아하고 사랑하며 살아왔다. 나이 먹은 세월에도 4월에는 괜히 이상한 눈물을 머금기도 한다. 진달래 만발한 산야에서 혼자 막걸리에 취하여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감상을 즐기기에는 4월이 정말 좋다.

그러나 올해는 한 번도 그런 감상을 즐겨보지 못했다. 많은 날들을 해변의 기름냄새 속에서 지냈다. 기름냄새 속에서 비켜 있는 날들은 이런저런 소소한 일들로 더욱 분주했다. 지난해 '장명수' 길로 걷기 운동을 할 때 눈여겨보았던, 탄성을 발하면서 내년의 조우를 기약했던 '그곳'의 진달래들을 올해는 만나지 못했다. 내가 진달래들에게 한 '약속'을 내가 지키지 못한 셈이다.

아쉽고 미안하긴 하지만 다시 내년을 기약한다. 내년은 올해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런 기대와 희망을 갖고 싶다. 그런 기대와 희망이 나를 살게 한다. 내년에도 4월은 다시 올 것이고, 4월을 장식하는 봄꽃들 속에서 탄성을 머금으며, 그 탄성 속에서 지레 허무를 체감하며, 괜히 눈물을 머금기도 하는 그 감미로움 속에 잠시나마 머물 수 있을 것이다.

<2>

지난 26일(토)을 즐겁게 기억한다. '놀토'인 덕에 전국 여러 개 성당에서 400명 이상이 태안성당을 찾았다. 거기에 태안성당 신자 40명 이상이 보태어졌다. 그 500여 명을 우리는 소원면 의향리 '태배' 지역의 '가르미' 해변으로 안내했다.

'신너루'라는 작은 포구의 해변 주차장에 모든 차량을 밀집시켜 놓고, 재활용 방제복과 장화를 착용한 자원봉사자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5분 거리인 산등성이를 넘어가게 하는 일이었다. 나는 핸드마이크를 잡고 작업 안내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께 특별한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진달래꽃들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산등성이 길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적당한 운동 코스입니다. 진달래꽃들과 적당한 운동을 즐기면서 작업장을 가고 올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선물입니까?"

봉사자들은 기쁜 웃음을 짓고 산등성이 길을 넘어갔다. 다소 가파른 편인 그 산등성이 길을 올해 85세이신 내 어머니도 즐거운 기색을 하고 넘어가셨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놀라고 감탄하는 이들이 많았다.

가르미 해변에서 어머니는 기름 닦는 일을 열심히 하셨다. 해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호미로 땅을 파고 작은 고랑이나 웅덩이를 만들곤 했다. 웅덩이 물에 돌들을 문질러 닦은 다음 물 위에 뜬 기름을 흡착포로 잡아내는 일을 능숙하게 하셨다.

평소 눈썰미가 좋고 '의견'이 많으신 어머니였다. 작업장 안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에 스스로 일의 요령을 알아채신 것 같았다. 85세 고령과 상관없이 손놀림은 치밀하고도 정확했다. 전체 봉사자들 중에서 단연 최고령이실 터였다.


▲ 85세 노인도 / 태안 해변에서 기름제거 작업을 한 130만 명의 자원봉사자들 중에서 어쩌면 내 어머니가 최고령자일지도 모른다.  
ⓒ 지요하  재난봉사

지금까지 태안 해변 기름제거 작업에 참여한 13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 중에서 85세이신 내 어머니가 최고령자인 것은 아니더라도, 이 날의 가르미 해변 봉사자들 중에서 최고령자라는 사실은 내게 흐뭇한 마음을 갖게 했다.

또 이 날은 내 어머니가 처음 해변 기름제거 작업에 참여하신 날이었다. 그리고 올해 대학 3년 생인 딸아이도 할머니와 함께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우리 가족(다섯 명에다가 데리고 사는 엄마 없는 두 조카아이를 합해 일곱 명) 모두 해변 기름제거 작업에 참여한 기록을 갖게 되는 날이기도 했다.

마누라와 아들녀석과 조카아이들은 일찍이 두세 차례 작업에 참여했다. 겨울방학 때와 봄방학 때 마누라와 아이들은 소원면 모항2리 해변에서 작업을 했다. 그리고 4월 26일 어머니와 딸아이가 소원면 의향리 가르미 해변 작업에 참여했으니, 우리 가족은 일곱 명 모두 해변 기름제거 작업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것은 태안지역 주민으로서의 일종의 '의무'에 동참한 것이기도 하고, 가족공동체의 어떤 '떳떳함'으로도 연결될 수 있는 사항일 터였다. 그렇게 거창한 생각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다행스럽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작업에 열중하는 고령의 노모와 대학생 딸아이를 보며 마음속으로 감사했다. 이미 작업에 참여했던 마누라와 아들녀석과 조카아이들에게도 감사했다. 외지에서 오신 자원봉사자들에게 떳떳해지는 마음이어서, 그들이 더욱 고마워지는 마음이기도 했다.

<3>

27일(주일)에는 또 하나의 색다른 풍경이 '신너루' 해변에서 있었다. 서울 도곡동성당, 명일동성당, 대구 효목동성당, 의정부 용현동성당과 대전가톨릭대학교 등에서 도합 500여 명이 작업에 참여한 날이었다.

명일동성당은 150여 명이 네 대의 버스를 타고 와서 단연 최대 규모였다. '레지오 마리애'의 '꾸리아' 단원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소주와 맥주, 누른 쇠머리고기와 홍어회 등 먹거리를 푸짐하게 준비해왔다. 작업을 마치고 나와서는 그 먹거리들을 버스 옆에다 풀어 헤쳐놓고 다른 본당 신자들에게도 대접을 했다. 좋은 봄날의 흥겨운 잔치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데 모여 레지오 마리애의 '까떼나' 기도를 합송했다. 지난 5개월 동안 전국 각지 성당에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수없이 왔지만, 한 본당의 꾸리아가 작업을 마친 다음 해변에서 함께 '까떼나' 기도를 바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 모자의 작업 / 서울 문정2동 성당에서 왔다는 모자. 함께 하는 기름방제작업 덕에 더욱 정다워보이는 모습니다.  
ⓒ 지요하  재난봉사

나는 그동안 여러 번 타 본당에서 온 봉사자들과 함께 해변에서 기도를 했다. '주모경'부터 한 다음 작업 요령을 설명하기도 하고, 작업을 마친 봉사자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고 감사 인사를 한 다음 기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100명이 훨씬 넘는 레지오 단원들이 작업을 마친 다음 해변에서 자진하여 다 함께 레지오 기도를 하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나는 같은 레지오 단원으로서 기도에 동참하면서 더없이 흐뭇해지는 마음이었다.

기름제거 작업을 마치고 태안의 해변에서 레지오의 '까떼나' 기도를 바치고, 또 태안의 재난 극복을 위해 기도해주신 명일동성당 신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또 한가지 감사해야 할 일이 있다. 이 일 역시 '처음' 있었던 일이다. 내가 명일동성당 꾸리아 단장의 부탁으로 시낭송을 한 일이다. 인터넷 상에서 내 시낭송 실력(?)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50대 중반의 그 형제님은 나를 신자들에게 소개하고 나서 시낭송을 부탁했다. 나는 기꺼이 애송시들 중의 하나인 홍윤숙님의 '장식론'을 들려드렸다.

핸드마이크를 잡고 시낭송을 하면서 한껏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내 시낭송을 듣는 명일동성당 신자들의 태도는 참으로 정숙하고도 진지했다. 내가 오늘은 기름제거 작업을 하러 온 이 해변에서 처음으로 시낭송까지 하다니! 가슴에 행복감이 가득 차는 듯했다.    

(그런데 나는 이날 카메라를 휴대하지 않은 탓에 명일동성당 레지오 단원들의 해변 기도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명일동성당 신자 한 분이 시낭송을 하는 내 모습까지 촬영을 했다고 해서 내게 메일 전송을 부탁하고 약속까지 받았는데, 그 약속의 이행여부는 아직 가물치 콧구멍이다.)

<4>

가르미 해변은 포크레인으로 이미 바닥을 여러 번 뒤집었는데도 기름이 많이 나온다. 파고 뒤집기만 하면 기름이 나온다.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조금 돌아가면 포크레인이 들어갈 수 없는 지점인데, 작은 바윗돌들이 가득 덮인 그곳에서는 어디서든 '유전'이 발굴된다. 바윗돌을 하나만 떠들어도 쉽게 기름덩이들을 볼 수 있다.

길이 없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곳이다. 급하게 능선으로 찻길을 만들고, 작업장으로 내려가는 길들을 만들었는데, 인력 투입이 지체되는 바람에 기름을 오래 방치한 상태가 되어 다른 곳들보다 땅속으로 파고든 기름이 유난히 많다.

기름의 '매장' 상태를 내 눈으로 충분히 식별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천주교 신자 자원봉사자들을 계속 그곳으로 안내하고 집중 투입할 생각이다. 자원봉사자들에게 작업 보람을 안겨주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자원봉사자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든 상태다. 다른 단체들의 봉사활동은 거의 끊긴 것 같다. 지난 3월말에 해단식을 갖고 봉사활동을 종료한 단체들이 많다. 
  

▲ '유전' 발굴 / '가르미' 해변은 포크레인이 여러 번 바닥을 뒤집었는데도 여전히 '유전'이 나온다. 그러나 머지 않아 끝을 볼 날이 올 것이다.  
ⓒ 지요하  재난봉사

하지만 천주교 쪽의 봉사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6월말까지 봉사 신청을 한 본당과 단체들이 많다. 다행스럽고도 고마운 일이다. 천주교 신자로서의 자부심과도 연결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태안군에서 작업 종료를 선언할 때까지 봉사 활동을 계속할 생각이고, 적어도 6월말까지는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끝까지' 갈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는 4월말로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떡국(점심) 급식은 종료하기로 했다. 봉사자들이 오랜 봉사로 지친 상태이기도 하고, 동절기에 어울리는 떡국을 하절기에도 계속 끓인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게 되기 때문이다.

수만 명의 봉사자들이 먹었고, 이구동성으로 맛있다고 하며 감탄까지 한 우리 태안성당의 떡국을 계속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미안하기도 하다. 우리는 5월부터는 봉사 신청을 받을 때 도시락을 준비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컵라면' 정도는 계속 공급해 드릴 생각이다. 대규모 인원일 때는 우리가 작업 현장에서 물을 끓여드릴 계획이고, 소규모 인원일 때는 나 혼자 작업장 안내와 작업 주선을 해드리고, 작업장마다 설치되어 있는 마을 주민들의 캠프(비닐하우스)에 편의 제공을 부탁하려고 한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천주교 쪽의 자원봉사자 안내를 책임지기로 했다. 떡국 급식 봉사가 종료되어 작업장 풍경이 쓸쓸하게 되었을지라도, 대규모 인원이든 소규모 인원이든 작업장 안내와 작업 주선 임무를 내가 계속 수행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국 천주교 신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자원봉사 참여를 계속 기대하며 부탁드린다. 해변 기름냄새 속에서 더욱 덧없이 4월을 잃었지만, 신록의 계절이며 계절의 여왕인 5월마저 잃더라도 나는 '기름과의 전쟁'을 계속할 생각이다.


2008.05.01 08:31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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