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들의 말로를 보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7-18 조회수448 추천수1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오랜만에 굿뉴스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들어오지는 못했어도 일상생활 속에서 많은 묵상거리가 있었는데 메모를 남길 그런 여유도 없고 해서 그냥 최근에 많이 묵상한 주제를 바탕으로 해서 한번 공유하고자 합니다. 제가 아무리 제 개인적인 일이 바빠도 본당에서 상이 나면 지금까지 근 12년 동안 몇 번 제외하고는 연도는 빠지지 않고 거의 다 했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나면 아주 친분이 있는 분 같은 경우에는 입관도 많이 참관했습니다. 사실 입관은 제가 천주교에 와서 많이 해서 이젠 두렵거나 약간 무섭거나 하는 것도 없습니다. 보통 보면 연령회 봉사하시는 분들 외에는 그리고 친형제처럼 친하지 않는 이상은 입관식 참여는 대부분 꺼려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에 입관 예절에서 실제 손이나 얼굴을 꺼리낌없이 만지며 이별을 아쉬워하며 했던 자매님이 몇 분 계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분들의 공통점은 저한테 아낌없는 사랑을 주신 분이셨기에 저도 그분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서 그랬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제목에서 보듯이 자의든 타의든 어찌됐든 하느님을 떠난 사람들의 말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한 달 전에 이 이야기를 한번 올리고 싶었는데 개인적인 일에 집중을 해야 해서 올리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론 냉담을 하기도 합니다. 냉담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냉담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냉담하는 교우 본인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 때론 여타 다른 이유로 냉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의를 내리는 냉담 말고도 그냥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냉담이라는 냉담을 가지고 한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올 11월이 되면 만 12년이 됩니다. 그동안 12년 가까운 세월 본당에서 장례미사와 연도 정말 많이 했고 영세받고 한 6년 정도는 거의 모든 장례미사에서 복사를 다 섰습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제가 최근에는 우연히 어떤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제목에서 언급한 내용과 비슷합니다.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을 떠난 사람들의 말로' 이렇게 언급하고 싶습니다. 

 

본격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우연히 발견해서 안 사실이지만 실제는 그동안 이걸 많이 생각해봤기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요 하느님을 떠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끝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과학적인 데이터로 증명은 할 수 없습니다. 주관적인 견해임을 말씀드리지만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가 통계학을 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예전에 제 룸메이트가통계학을 공부한 친구라 그 친구 때문에 알게 된 통계상식이 많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제가 주장하는 사실에 근거가 바로 이 통계적인 내용도 가미가 돼 있습니다. 자 그렇다고 제가 하느님을 떠난 사람들의 말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셔서 그렇다고는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건 절대 아닙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분명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처럼 보여질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저도 신앙이 깊지도 않지만 얕은 신앙을 가지고 무지했을 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10년 넘게 가톨릭에서 신앙생활을 한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전제를 미리 말씀드리는 이유는 자칫 잘못하면 잘못 이해하실 수도 있기 때문에 사전에 오해 아닌 오해의 소지를 막기 위해 드린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아주 힘든 일이 부닥쳤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원론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한다면 기도와 신앙으로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저도 많은 신부님과 그동안 수많은 토론을 하며 내린 결론입니다. 뾰족한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론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선책으로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힘든 일 때문에 하느님을 떠나는 일만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떠난다고 할 때의 떠나는 기간은 보통 보면 잠시라고 생각하고 또 그동안만 떠나 있다가 돌아오겠다는 생각으로 냉담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주 특이하게 처음부터 아예 이젠 하느님과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떠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희박합니다. 근데 문제는 처음에는 잠시 동안만 떠나 있다가 돌아오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어찌 하다 보면 그 잠시가 그냥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물론 잠시 냉담을 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 경우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경우는 바로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경우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면이 서지 않아서 마음은 장례미사를 하고는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냥 일반 장례로 마무리하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하느님을 떠나도 다시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처럼 회개를 하고 돌아오면 되는데 사람이 세상에 빠져들게 되면 그냥 다시 돼지가 오물을 묻히고 묻혀도 묻은 줄 모르고 뒹구는 것처럼 우리 인간의 죄성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실제 해수욕장에서 몇 초만 잘못 했더라면 익사할 뻔했던 경험이 있어서 압니다. 마치 이런 것과 비슷합니다. 한순간 수영하는 감각과 균형을 놓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해류의 힘에 의해 쏠리게 돼서 그냥 가라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해류를 세상에 비유하면 딱 맞을 겁니다. 달리 표현하면 세파와도 같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시류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낳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하느님을 떠나도 그나마 건강하면 조금은 다행입니다. 근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보통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느님을 떠나서 특히 병과 질병을 얻었을 땐 그것도 생사를 가르는 병을 얻게 됐을 때 그때 하는 후회가 보통 보면 무서운 병을 얻은 것에 대한 원망 아닌 원망보다는 하느님을 떠난 결과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서두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또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는 사실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가하면 제가 언젠가 묵상글에서 표현을 했습니다만 심판은 하느님이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심판을 자초한다고 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국은 이런 일도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초래한 책임을 본인 스스로가 응분의 대가를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와 공정'에서 정의가 될 것입니다. 이 정의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정의가 아니라 우리가 한 행위에 대한 책임론에서 바라봤을 때 정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행착오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 신앙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 너무 자만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자만해서 넘어지는 사람도 봤습니다. 넘어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최근에 저는 그런 사례도 봤습니다. 단순히 넘어지는 수준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이 보여준 여러 신앙의 정수가 진짜가 아니라 보여주기식 신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신앙으로 추락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역으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개인이 한 개인의 신앙을 단적으로 평가를 하는 것도 절대적으로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싶게 말해서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자기가 맨날 자신의 잣대로 평가를 한 사람이 자신이 생각한대로가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의 보좌 가까이 있고 자신은 형편없는 위치에 있다면 그때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살 때 참으로 어리석었다고 말입니다. 

 

그럼 이제 지금까지 두서없이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잠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상처라든지 아니면 어려움에 부닥쳐서 하느님을 떠나 살려고 하는 유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 설령 그런 유혹에 넘어지게 되었을 땐 그래도 잠시 소나기를 피하는 심정으로 그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가 하느님 품안에서 있어도 죄를 짓게 되는데 꼭 죄를 논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빠져 있게 되면 확실히 하느님 안에 있을 때보다는 더 죄와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세상에 빠져도 확실히 자신을 보호하며 철저히 신앙으로 다져 세속에 빠지지 않는 분도 계시지만 우리는 그런 확률을 보면 되지 않습니다. 그런 확률을 가진 분은 특별한 분입니다. 힘들고 하면 잠시 소나기를 피하는 방식으로 해서 지혜롭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제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어떻게 하는 게 그나마 지혜로운 신앙생활인지을 알려드리고 싶지만 그건 어쩌면 자만이고 교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원론적인 입장에서 소나기를 피하는 이 방식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제가 개신교에 있을 때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견디는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씀은 개신교나 천주교나 공히 공통적인 말씀이라 이 말씀과 함께 끝까지 지혜를 잘 발휘해서 승리하게 되면 그 노력은 분명 하느님께서 응분의 대가를 치러주실 거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혹시 지금 신앙의 어려움이 있어서 낙담하고 계신 분 계시다면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더 두 손에 있는 힘을 다해 불끈 쥐고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다시 힘을 내봤으면 좋겠습니다. 백년 사는 인생이라도 백년 인생 잠시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긴 세월 같지만 지나고 나서 자신의 생애를 생각해보면 왜 이렇게 살았을까 하고 후회하는 삶을 누구나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후회를 그때 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지금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자문해본다면 그 해답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해답 중 제가 생각하는 것 하나를 말씀드린다면 먼저 욕심을 내려놓고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고 하루하루 성실히 하느님 안에서 사랑으로 이 세상을 자신의 가슴으로 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잘 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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