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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해야 할까?
작성자김백봉7 쪽지 캡슐 작성일2023-08-29 조회수448 추천수4 반대(0) 신고

 

 

 

 

 

 

 

2023년 가해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해야 할까?>

 

 

 

 

복음: 마르코 6,17-29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오늘은 요한 세례자가 수난 당하고 죽임을 당한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춘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는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왕이 아니라 노예였습니다. 세상의 시선 때문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방식대로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로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춤을 잘 추고 자신의 상품을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헤로디아도 노예였습니다. 쾌락과 돈과 권력의 노예였습니다. 헤로데에게 붙어있기 위해 그것을 비판하는 요한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다 가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오직 요한만이 세상 것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 뜻에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 발버둥 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다 이루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것이 믿는 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크게 세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기 직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숨 넘어가는 소리로 “내 돈 2억 갚아, 임마!”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모두가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삶과 완전히 별개로 여깁니다. 

 

 

    두 번째는 체념하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라 여깁니다. 저희 할머니는 임종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가 성당 나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란 이름으로 대세를 받으셨습니다. 저희 고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불교를 믿으셨고 끝까지 하느님을 믿기를 거부하셨지만, 마지막 순간 대세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가 된 경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죽음을 삶과 별개가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삶에서 실천해오던 하느님 뜻을 죽음과 연결합니다. 부활이 보장되어 있기에 죽음도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도구로 죽음을 이용합니다. 요한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면서도 며칠 동안이나 설교했다고 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을 구하러 왔던 주인공은 죽어가면서 라이언에게 “잘 살아야 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라이언은 평생 자신을 위해 죽은 사람들 때문에 못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그들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묻습니다. 

    “여보, 나 잘 살았지?”

이런 이들은 죽음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이용할 줄 안 사람들입니다. 

 

 

    전태일도 근로 기준 법전을 끌어안고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라며 죽었습니다. 누구는 자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자기 죽음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보았던 가장 감동적인 죽음은 어떤 자매님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방학 동안에 이태리 본당에 실습을 나갔는데 어떤 분들이 한 자매님을 가리키며 저분이 말기 암 환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아 귀 여겨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의 여름에 다시 갔는데 그분이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이라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과 함께 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왠지 저를 기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장례식 때는 시골 본당이 가득 찼습니다. 

그분은 3개월 산다고 암 선고를 받았는데 3년을 사셨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픔을 호소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분은 항상 오늘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이웃에게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분이 죽기 직전이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그 자매에게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그분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용한 분입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였고 그래서 그분의 삶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먼저 자신이 왕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왕이 아닌 하느님 자녀인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는 이 세상이 멸망해도 영원히 삽니다. 그러니 왕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영향은 주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지는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영향을 받으면 어떻게 자녀를 교육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예언자의 면모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의 죽음은 이 지상의 노예로 사는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죽음으로 세상이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교육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사제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헤로데는 나중에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죽인 요한이 아니냐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죽음으로 헤로데를 그리스도께 오게 하였습니다. 물론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자기 선택입니다. 그러나 돌아가시면서 자녀들에게 꼭 성당 다니라고 한 마디는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https://youtu.be/TdL8d5-PKgY?si=P_6zMKihWORTw_w6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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