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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의 2008년 4월 여행기 제13탄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27 조회수392 추천수3 반대(0) 신고
 
 
유럽 여행기 - 납골당과  바르보라 성당
 
 
프라하에서의 첫날을 보낸 저희는 둘째날인 오늘, 먼저 프라하 한인공동체와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주례 및 강론은 이 여행기를 통해서 국민배우로 새롭게 태어난 정병덕 신부가 하였지요. 그리 많이 모인 것은 아니지만, 가족적인 분위기와 함께 주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장면 하나.

복사들은 복사옷까지 잘 차려 입었는데, 신부들은 주례사제만 딸랑 영대 하나 매고 있다는 것이지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미사 후 저희는 1시간 30분 정도를 이동하여 꾸뜨나 호라 세들레쯔에 있는 납골당으로 향했습니다. 정말로 특이한 곳.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봅니다.

꾸뜨나 호라 지역은 약 10세기경 조성되었는데 오늘날 야곱교회라고 부르는 사원과 자보지나들 라벰과 슬라브닉 귀족 가문이 자리 잡았던 말린에 있는 정통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들을 그 증거로 들 수 있다. 995년 슬라브닉 전 가문이 몰살당하고 그 통치권이 마르끄바르틱 가문에 주어졌다. 슬라브닉 가문의 일원이었던 미로슬라브가 보헤미아의 여기 세들레쯔 지역에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시토 수도회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1142년 맨처음 발트사센의 프랑크 수도원에서 12명의 수도사가 이곳으로 왔다.

세들레쯔 인근지역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납골당이 있는 꾸뜨나 호라가 유명해지게 되었고 성모 마리아 승천교회(1280~1320년에 지어짐)가 세워 지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그 무렵에 공동묘지가 있는 오늘날의 납골당이 만들어졌다.

1278년 보헤미아 왕 오따까르 2세는 공식사절로 수도원장 헨리를 이스라엘로 보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떠나오면서 골고다 언덕에서 흙 한 줌을 가져다가 세들레쯔 수도원 공동묘지에 뿌렸는데 그 결과 보헤미아와 중부유럽 전 지역에 이 사실이 알려져 부유한 사람들이 앞다투며 이곳에 묻히기를 원하였다. 이 매장지는 14세기와 15세기 초 페스트의 만연과 후스전쟁으로 인해 더욱 확장되었다.

(1318년 약 3만명의 사람들이 여기에 매장되었다) 공동묘지는 약 3500평방미터였는데 후에 일부 폐지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뼈들은 처음에는 수도원 주변에 쌓아 두었다가 후에 안으로 옮겨왔다. 뼈 장식 작업은 1511년 반 장님이었던 시토 수도회 소속 수도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14세기에 지어진 정통고딕 양식의 납골당 안에 두개의 채플이 있었다. 그러나 1421년 후스 전쟁 당시 납골당이 불에 타 무너졌버렸다. 오늘날의 납골당은 유명한 이탈리아 건축가 산타니에 의해 1703년 사이에 체코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다 짓고 난 후 건물의 분위가 이상하여 조금 수정하였는데 서쪽 정면 두개의 탑 사이에 보호물이 그 때 세워졌다. 산티니는 또한 피라미드 위의 왕관이라든가 장식촛대 같은 다른 보충물과 뼈들로 장식하도록 실내를 개조하였다.

납골당 밖으로 나와서 건물을 보면 1709년 M.V.Jackl에 의해 만들어진 성모 마리아 상이 교회당 정면 두 탑 사이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은 납골당 앞에 서 있는 성 얀 네뽀묵의 동상이다. 그것은 네 명의 성인 - 바츨라프, 보이띠예흐, 쁘로꼬프, 폴라리아 - 옆에 있다.

1784년 황제 요셉 2세가 수도원을 폐지했고 그 소유권을 귀족 가문 슈바르젠베르그에게 넘겼다. 1870년 부터 날짜가 매겨진 오늘날의 뼈 장식물은 체코의 나무 조각가 프란티쉑 린트의 작품이다. (마지막 계단 오른쪽 위에서 그 이름을 볼 수 있다) 원래 뼈 무덤이 6개 있었는데 그 중 2개를 그가 없애버렸다. 모든 뼈들을 다 소독한 후에 회칠하여 사용하였다. 프란티쉑 린트는 또한 장식으로 슈발젠 베르그의 갑옷 위에 입는 문장이 든 덧옷을 사용하였다. 사용되지 않은 나머지 뼈들은 다시 매장되었다.

입구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인류의 구원자 예수라는 뜻인 HIS 가 새겨져 있다. 계단 양 쪽에 마주보고 두개의 성찬잔이 있다. 계단을 다 내려가면 오른쪽에 FRANTIŠEK RINT Z ČESKÉ SKALICE - 1870 이라고 새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체코 조각가 프란티쉑 린트 - 1870) 지하 채플 한 구석에 커다란 뼈 무덤 피라미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뼈들은 서로 묶지 않고 쌓여있다. 인간의 뼈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아무도 중요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죽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속죄 - 예수의 구원의 작업은 그의 탄생, 십자가에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것은 모든 죽은자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완성될 수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명이 주어질 것이다. 의인에게는 하늘의 상급이 주어질 것인데 이것은 나무 왕관으로 상징되고 있다.

지하 교회 중앙에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뼈를 이용한 상들리에가 있다. 상들리에 밑에는 지하 납골소가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데 거기에는 15명의 부유한 시민의 유품이 보관되어있다. 납골소 주변에는 바로크 양식의 장식 촛대들이 있다.

제단 벽의 움푹들어간 곳에 성체안치기를 발견할 수 있다. 지하 채플 왼편에 슈바르젠베르그 가문 소유의 문장이 든 덧옷을 볼 수 있다. 이것은 1591년 rAAB 전투에서 슈바르젠베르가가 터어키에 승리한 것을 상징한다. 장식장 안에는 후스전쟁의 용사들의 해골을 전시해놓고 있다.

이 납골당은 약 40,000명의 보통 사람들의 무덤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뼈 장식 작업은 영원성의 가치와 그 진상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이웃을 향한 책임을 다 했을때에만 우리를 용서하신다. 용서의 계율은 우리가 죽을때 적용 될 것이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사람의 뼈를 가지고서 저렇게 만들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괜히 찝찝한 마음을 간직하게 되네요. 그렇지만 문화의 차이려니 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이해해봅니다. 그런데 안내해주신 형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이 납골당이 돈을 받기 시작하면서, 저렇게 건물이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정말로 기울어 지고 있더군요. 불안할 정도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통해 장사를 하겠다는 것. 바로 이 점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이제 쿧트나 호라의 바르보라 성당입니다.

쿧트나 호라에는 커다란 은광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은이 전 유럽에 제공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성당은 광부들을 위해서 봉헌된 성당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성녀 바르보라(광산의 수호성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프로스트 벽화도 볼 수 있고요. 주변의 경관도 아주 멋진.. 그리고 성당도 아주 멋진 그러한 곳이네요.











관광을 마치고 프라하 공동체에 강의를 했습니다.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서 강의를 했지요. 시간이 조금 부족해서 제가 원하는 말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별 내용도 없는 강의를 끝까지 열심히 들어주신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강의 후에 체코 현지 성당의 신부님과 사진을 한 컷 찍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러 가면서, 야경이 너무나 좋아 사진 몇 장 찍었습니다.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식당 안으로,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한국말로 된 메뉴판이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서 한국 메뉴판이 있다고 하던데요.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음식시키기 편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현지 음식들을 먹었지요. 어떤 것을 먹었냐면요…





사실 올릴 사진이 더 많았는데요. 왜냐하면 식사 후에 아주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거든요. ㅋㅋ 그런데 개인의 프라이버시 때문에 차마 못 올리겠습니다. 아무튼 좋은 분들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지요. 오늘 주일 미사 강론을 또 저에게 하라고 하네요. 그래서 여행기를 여기서 마치고.. 이제부터는 주일미사 강론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주님 안에서 모두들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Angel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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