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벽을 쌓는 평가와 판단/영적성장을 위한 감성수련 문종원신부님
작성자조연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21 조회수551 추천수5 반대(0) 신고



  

 

*벽을 쌓는 평가와 판단  *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에페 2,14).
 
 
 

우리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규정이나 법에 의해서 서로의 벽을 쌓곤 합니다.

공동체가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삶의 법칙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갈라놓고 담을 쌓아 원수가 되게 합니다.

이러한 규정과 조문을 통해 서로 판단하고 평가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평가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평가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평가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판단하지 않는 태도를 몸에 배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의사전달 방식을 잘 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의사전달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지 모릅니다.

평가한다는 것은 비교한다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그것이 좋았다거나 훌륭했다거나

아니면 아주 못했다고 평가를 받으면서, 우리가 성취한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주 평가를 당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성취한 것이 우리의 기준점에 도달하는 지를 평가하면서,

우리도 얼마나 자주 같은 방법으로 점수를 매기는 지 모릅니다.


 이것은 늘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학교 생활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

또는 잘 행동하는 방법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부모님이 부모로서

얼마나 잘하고 있는 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평가에 관한 사고 방식이 계속된 것입니다.


 일상을 통해  평가를 하는 일반적인 삶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아이에게 시험에서 A를 받으면,

“아주 잘했어. 장한 일이야.”라고 말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참 멋있는 저녁 식사야.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음식을 해.”

한 점원이 다른 사람에게 불평합니다.

“그 사람은 그일을 끝내지 못할거야. 그는 수준 이하야.”


 우리는 화가 치솟아 오르고, 미워하기까지 하고, 그 다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느끼기 때문에 무섭다.”

부모는 헌신하지 못하면서도 아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꾸짖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이 싸우지 않는거야.” 

 

 인간은 평가를 받음으로서 얽매이게 됩니다.

일의 성취, 정서적인 조절, 사회적 숙련도

또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같은 활동 무대 안에서,

우리는 성취하는 것에 등급을 매기도록 강요를 받습니다.

그때 우리의 자존감은 최종적인 점수표에 기초해서 오르락 내리락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영역에서 가장 심하게 평가를 하고 있는 지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등급을 매기거나 뛰어나게 해야 한다고 강조를 하는 것등등을 말합니다.           

 

 아무리 긍정적인 것이라고 해도, 어떤 평가든,

암암리에 다음과 같은 위협을 전달하게 됩니다.

당신은 높은 성취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또는 나는 당신에게 당신이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말할 것이다.”

완벽하게 되려고 할 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무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무능력과 연결해서 지나치게 평가를 받을 때

욕구좌절과 화를 극도로 불러 오게 됩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우리의 성취에 대해서

점수를 매겼을 때와 똑같습니다.

래서 우리는 “잘했다.”라는 말을 듣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아주 피곤한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에 길들여진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숨기기도 하고 

어떤 부정적인 느낌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나쁜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일들을 누구에게든 알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 정서적으로 아주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무능하다고 지적한다면,

방어적이 되고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렇게 방어를 했을 때 욕구좌절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린 아이는 성취한 것에 관계없이 부모님이 자신을 질책하지 않고

진정으로 받아들이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 받을려면 점수를 많이 따야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진실로 좌절감을 느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우리의 존재는 평가한 전체 점수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존재 하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평가에 기울어 지는 성향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이 되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서로가 점수를 매길 때,

힘을 소비하게 된다고 고린토인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만든 척도로 자기를 재고 자기가 세운 표준에다

자기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2고린 10,12).

진실한 인격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우리 인간들은 서투른 판관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판단하는 데서 벗어나라고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불공정한 판단을 받을 때를 회상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판정을 받는 경우입니다.

 

 분노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점수와 판단들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어떤 평가도 완전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십시오.

대신에, 우리의 생각들을 묘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등급을 매기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대체한다면

많은 분노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의 학교 일에 대해서 토론할 때,

‘너는 아주 잘했어,’라고 말하는 대신,

내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묘사하라는 말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라는 것입니다.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좋은 성적을 받았구나,

그래서 아주 기쁘지. 그렇지 않니?’

이것이 바로 어떤 사람의 내면의 이야기를 하도록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창조성을 요구할 수 있지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한 행동보다는 그사람의 느낌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의사전달을 하는 데 있어 상당히 유익합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과제에 대해 얼마나 잘했는 지를 말한다면,

그 평가에 의해서 매혹되지 마십시오.

다음날 어떤 일을 한 것에 대해 참으로 형편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반응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배우려고 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의 정서적인 안정성이 최종적인 평가에 좌우되게 하지 마십시오.


  우선, 자신이 평가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조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수학 시험에서 50점을 받았을 때 부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네가 그러한 점수를 받았을 때 실망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침울한 기분을 느끼게 했지, 그렇지?”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을 때 남폄은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늘 오후에 아주 바쁜 가운데서도 당신은 함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시간을 냈지.

나는 당신의 헌신에 깊이 감사해!” 심하게 화가 났을 때,

그런 정서를 가진 것에 대해서 자신을 단죄하기보다,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평상시보다 오늘 더 긴장을 느낀다;

이것은 나에게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묘사하는 식으로 사고 방식을 적용할 때

우리는 하느님처럼 온전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서적인 짐이나 거짓 죄책감 또는 자신이 자초하는 화에서 해방되어,

우리는 도움이 되는 생각들이나 개념들을 계속해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평가하는 것을 피할 때 공격적이고 경쟁적인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우월감이라는 거짓 게임에 빠져 들기보다,

우리는 존재에 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똑같이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에페 2,15-16).

 

 

 
 
         

 


 cafe.daum.net/mj1992

영적 성장을 위한 감성수련문종원베드로신부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