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3-01 조회수447 추천수1 반대(0) 신고

 

사순시기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 중 하나가 회개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굳이 사순시기가 아니더라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항상 회개를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제도 회개, 내일도 회개 하면서 언제까지 우리가 얼마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끊임없이 회개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도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회개의 가장 기본적인 어원의 근저에는 돌아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회개 하면 죄를 짓고서 뉘우치는 것을 보통 떠올리기 때문에 어쩌면 회개를 하라고 했을 때 우리는 진저리나는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을 때도 죄를 짓게 되는 것이 되지만 죄라는 것은 명시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규정된 것이 있을 때 굳이 의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그걸 덜 실천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죄를 짓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항상 굳이 사순시기가 아니더라도 신앙생활에서 회개하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약간 거부감 아닌 거부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저는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해보면 공통점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수시로 잘 성찰하는 게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즘은 이런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려고 하는 원의가 가득한 사람의 눈에는 성찰거리가 눈에 보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설령 성찰할 요소가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고해소에서 고해를 볼 때 맨마지막에 하는 게 있습니다.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사해달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 중요한 걸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알아내지 못한 죄와 알지 못한 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게 어떻게 다를까요? 이 두 가지 개념의 차이점은 성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아내지 못한 죄는 성찰을 했을 때 적용이 되는 말입니다. 찾다 찾다 못 찾았을 때 적용되야 하는데 사실 우리는 악용아닌 악용할 경우도 더러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무책임한 것입니다. 하지만 알지 못한 죄는 분명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라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분명하지만 자기가 봤을 때 그게 죄라는 것이 인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인간 세상의 형법에도 16조에 법률의 부지라는 법 조문이 있습니다. 이 내용을 약간 적용하면 조금 더 잘 이해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건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양분할 수 있습니다. 법률의 존재를 몰랐을 때 어떤 경우는 죄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제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또 하나의 경우입니다. 단순히 몰랐다는 사실만으로 죄의 성립을 조각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게 주요 요지입니다. 형법 16조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법이지만 이걸 우리 신앙에 접목해보는 것도 유익한 묵상이 될 것입니다. 어제 복음이 최후의 심판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제목을 최후의 심판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을 했을 뿐이지 만약 정말 그 내용만을 절대적인 심판의 내용으로만 한다면 굳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에 그렇게 많은 구구절절한 역사와 기록을 언급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요? 그냥 단순히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내용만 강조하면 될 일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하느님의 말씀이 존재한다면 분명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겁니다. 성경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는 이유는 여러 각도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 인간이 다양한 방법으로 헤아려보는 의미도 존재한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판공성사를 볼 경우 때만 아니라 죄를 성찰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게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단순히 열 개의 항목으로 상징적인 표현을 했을 뿐이지 각 항목의 세세한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는 평소에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내용을 잘 숙지가 되지 않으면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분명 나름 자신 스스로가 성찰을 한다고 했어도 자신이 죄를 지었어도 그게 죄가 되는지 모를 수 있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하느님 심판대 앞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심판대에서 이런 사실을 하느님께 말씀드렸을 때 면책이 될까 하는 것입니다. 그건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하느님의 자비는 끝도 없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건 면책이 된다고 하더라도 면책이 되지 않을 하나가 있을 겁니다. 바로 인간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이 알고 있는 양심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이 양심법을 악용해 면책하려는 요행을 부리려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설령 그런 꼼수를 사용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그걸 모르실 이유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단순히 몰랐다는 말인 핑계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양심을 성찰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생을 살면서 이 훈련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 천국문에 다다를 수 있는 거리는 그만큼 가까울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회개의 삶이 천국문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첩경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