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3월 25일 야곱의 우물- 요한 8, 1-11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3-25 조회수446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1-­11)

사순절 막바지에 접어듭니다. 계속 루카복음을 따라오다가 오늘은 요한복음으로 바뀝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특징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이 많기에 오늘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이야기가 마치 루카복음의 이야기같이 느껴지면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멋지게 위기를 극복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때는 초막절 축제기간입니다.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과 예루살렘 성전 뜰 사이에서 움직이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올리브 동산은 예수께서 인간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피땀 흘리며 받아들일 장소요, 성전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장소입니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벌써부터 예수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살벌한 분위기. 그러나 이른 아침 예수께서는 여전히 성전에 가셔서 가르치십니다. 초막절은 빛의 축일이기도 했기에 예수님은 이른 아침 뜨는 태양처럼 참된 빛으로 성전에 오셔서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나타나시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합니다. 간음한 여자를 현장에서 잡아다가 모든 이들 앞에 보란 듯이 내세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묻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8,5ㄴ) “어떤 남자가 자기 이웃의 아내와 간통하면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0,10)고 율법은 말합니다. 그런데 왜 여자만 붙들어 왔을까요? 이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께 재판에 대한 공정성이나 의견을 묻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들의 악의와 성차별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당하게 재판하지 않고 사형으로 몰고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스승님’이란 호칭 또한 마음으로 부르는 소리가 아닙니다. “스승이라고 불리우는 당신, 왜 빨리 대답을 못하시나?”라고 하고 싶었겠지요.

 

그 상황에서 그 여인을 살리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게 되고, 법대로 죽이라고 하면 평소에 사랑과 용서를 설교하시던 모습과 다르게 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예수님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한 듯합니다. 더구나 예수께서 궁지에 몰린 것처럼 빨리 대답하지 않으니 그들은 신이 나서 더 재촉합니다. 두 사람 다 죽음으로 몰고 갈 승리의 시간이 목전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몸을 구부리고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을까요? 이 행동의 의미는 분명치 않지만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예레 17,13)라는 구절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니면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는 말씀을 생각하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은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 내 심판은 유효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요한 8,15­-16)라고 하신 분입니다. 그들 모두를 올려보아야 하는 낮은 위치를 취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신중하고 겸손한 모습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8,7ㄴ).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 한 말씀에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멋진 장면입니다. ‘아기를 반으로 잘라서 각 어머니에게 나눠주라고 한’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분이 여기 계십니다. 지혜서는 말합니다.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7,22ㄴ-23).

 

예수께서는 기존의 관습과 제도와 법률에 대한 생각을 뒤엎어 버리시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십니다. 그러나 율법을 없애려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명을 주는 데 이바지해야 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며 율법 완성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고개 숙여 땅바닥에 뭔가 쓰십니다. 재촉하는 그들과 여유를 두시는 예수님은 아주 다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궁지로 몰고 갔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십니다. 당신이 판단하시지 않으십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던 율법교사가 누가 자신의 이웃인지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깨닫게 하셨고, 자캐오가 남을 속인 것이 있다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셨듯이 그들에게도, 여인에게도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십니다. 그들은 나이 많은 이부터 차례로 떠나갑니다.

 

예수님은 승-승의 길을 이루는 분입니다. 군중도 여인도 예수도 그 누구도 진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도 자신의 진실을 대면했으니 진 것이 아닙니다만 이 대면이 지속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들은 진정한 내면의 ‘승자’로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예수님을 붙잡아 단죄함으로써 ‘패자’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나도 네 죄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8,11). 여인에게도 이제부터 진정한 ‘승자’의 삶을 살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의 순서를 보면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러면 나도 네 죄를 단죄하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단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먼저입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조건 없는 용서를 보여주신 아버지처럼 예수님도 조건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여인의 죄를 묵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지은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지은 이에게 새롭게 살 수 있는 길을 터주심으로써 악을 이기십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