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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의 기도 해설> - 마태 6,7-15 본격해설
작성자김수복 쪽지 캡슐 작성일2009-10-07 조회수446 추천수1 반대(0) 신고
 

기도(6,5-8)

기도에 관한 부분은 자선에 관한 가르침보다 더 진지하다. 예수께서는 세 가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 기도하는 방법(7-8절)

- 마태오의 ‘주님의 기도’(9-13)

- 잘못한 이에 대한 용서(14-15절)

이렇게, 마태오는 기도에 관한 짧은 교리교육을 제시하고 있다. 그 교리교육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교육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권고의 기초는 “기도할 때에…, 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관행적인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자들은 남에게 보이려는 생각을 절대 하지 말고 아버지께 기도를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받을 상을 이미 다 받게 된다(5절). 자기 집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기도를 바치라는 명령(6절)은 기도까지도, 어떤 상황에서는(참조. 23,5),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이어서 기도할 때에는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제자들은,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각 사람이 필요한 것을 그 사람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은 주님의 기도(기도의 완벽한 본보기)로 완성된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주제, 즉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데 필수적이라는 주제를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주님의 기도(6,9-13)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 나온다. 마태오나 루카나 자기네 공동체들이 전례에서 사용하던 주님의 기도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 두 기도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주님이 몸소 가르쳐주셨다는 기도를 어느 쪽이 더 충실하게 전달했는지를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전례에서는 성경 본문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더 짧은 기도문(루카 11,1-4에 나오는 기도문)이 더 긴 기도문(마태 6,9-13에 나오는 기도문)보다 앞에 나왔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태오의 기도문이 예수님의 말씀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마태오가 원래 기도문을 더 길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루카가 주님의 기도를 더 정확하게 양식화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두 입장이 모두 어느 정도 확신을 주는 그럴듯한 논증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서와 병행을 이루는 루카 복음서의 본문은 기도를 다른 맥락 안에서 소개한다. 먼저 ‘일정한 장소’에서 기도를 바치시는 예수님을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서 보여준다. 그 다음,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자기들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하려고 예수께 다가가는 제자에 대하여 말한다. 복음서 저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했는지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시대에 다양한 종교 집단이 각기 고유한 기도방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어떻든 기도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특별한 방법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집단의 구성원들을 일치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그렇게 소개한 다음, 루카는 예수께서 그 청을 받아들여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는 말을 덧붙인다(루카 11,1-4). 그에 비해, 마태오는 주님의 기도를 산상 설교에 포함시킨다. 그러면서 단순하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라는 말로써 그 기도를 소개한다(9절).

그 두 기도문 사이의 차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서로 다른 전달대상자들에게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태오는 특히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고, 루카는 주로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교육을 하고 있다.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어릴 적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형식주의 또는 습관성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한편,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터득해야 했다.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 이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처음에 나오는 세 청원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청하는 것마다 하느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으로, 이인칭 소유격이 세 번 되풀이되고 있다. 둘째 부분의 청원들 역시 아버지께 올리고 있지만, 특히 인간의 필요를 두고 기도를 바친다. 여기에서는 ‘우리’라는 대명사와 ‘우리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주님의 기도 안에 들어 있는 청원이 여섯 가지인지 아니면 일곱 가지인지 의심이 간다. 성경 안에서 그리고 옛 동방에서는 7이라는 숫자를 선호했다. 그 청원이 여섯 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간청(“악에서 구하소서.”)이 소극적 양식을 취한 여섯째 청원(“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을 긍정적 내지 일반적인 모양으로 되풀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 이 짧은 해설에다 주님의 기도가 지닌 엄청나게 풍부한 신학적・영적 내용을 모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떼르뚤리아누스는 주님의 기도가 복음 전체를 축약하고 있다고 말한다. 주님의 기도 안에 나오는 많은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친밀하게 대화하시는 예수님의 기도가 어떠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참조. 11,25-27; 26,39). 그러나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바치지 않고, 당신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계신다.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우리의’라는 형용사(소유격)는 간청의 교회적 차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또 구성원 모두가 서로 형제자매인 공동체의 기도임을 나타내고 있다(18,15; 23,8-9; 25,40; 28,10). 왜냐하면 그분께 기도를 바치는 아버지께서는 모두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공동체의 전례에서 그리고 개인 기도에서 주님의 기도는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1세기 말에 쓴 ‘열두 사도의 가르침’(‘디다케’라고도 부른다.)도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즉 “하루 세 번 주님의 기도를 바치십시오.”(8,2-3)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입술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독창적인 그 깊은 내용 때문에도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출중한 그리스도교 기도가 되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네 복음서는 예수께서 아람어로 ‘아빠’(우리말의 ‘아빠’와 같은 뜻)라는 낱말에서 따온 ‘아버지’(나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당신 기도에서 사용하셨다. 가족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취한 이 표현은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맺고 계시는 관계를 특징짓는 신뢰, 애정, 자연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도 당신 체험을 나누도록 하신다. 하느님을 당신처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초대하신다. 당신처럼 자녀다운 단순하고 신뢰에 찬 태도로 하느님을 대하라고 당부하신다.

주님의 기도가 지닌 교회적 의도는 특히 ‘아버지’ 앞에 붙은 ‘우리’라는 형용사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형용사는 그리스도교 기도 안에서 공동체적 차원이 결코 빠진 적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버지 앞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사람, 당신의 모든 자녀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한편, 하느님의 가족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신자들에게 안전함과 위로의 샘이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의무가 생긴다.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나타낸다.

‘첫째 청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성경에서 거룩함은 하느님의 뛰어난 속성이다. 그 어떤 속성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사 5,16.19,24; 10,20; 30,11)을 그토록 깊게 나타내지 못한다. 하느님의 이름은 - 하느님 자신처럼 - 거룩하시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사람들의 눈에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름이 무시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합당한 영광과 영예를 받지 못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계시해 주시라고 청하는 것과 똑같이 거룩한 일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세 차례에 걸쳐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고(이사 6,3) 당신께 예배를 드리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이 청원에서 사용하는 동사는 수동태다(‘거룩해지소서.’). 여기에서는 분명히 다시 한 번 이른바 ‘하느님의 수동성’을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의 수동성이란 명시적으로 언급함이 없이 하느님에 대하여 말을 할 때를 가리킨다. 이 청원에서 실제로 청하는 것은 하느님이 스스로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라는 요청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계시하는 일은 오로지 하느님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일이며, 인간의 협력이 전혀 필요 없는 일이다.

에제키엘 예언서 본문은 이 청원의 의미를 더 잘 알아듣도록 도와준다. 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 나라들 사이로 흩어짐으로써 망신을 당하신다. 이방인들은, 귀양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당신 백성이 귀양살이를 하지 않도록 막지도 못하는 무능한 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이 몸소 뭇 나라 사이에서 망신을 당한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고 선언하신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 36,23) 하느님은 뭇 나라 사이에 흩어져 있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들여 뭉치게 함으로써 이방인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통일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에제키엘 본문은 하느님이 당신을 인정받게 하고 영광스럽게 함으로써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리라고 예고한다. 하느님의 이름이 망신과 조롱을 당하는 세계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피조물이 그 이름을 찬양하게 하시도록 청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또 앞으로 오실 분!”(묵시 4,8)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이 당신 통치권을 세우기로 마지막 결단을 내리실 때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둘째 청원에 이 주제가 나온다.

‘둘째 청원.’: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이 청원은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언급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설교에서 중심 주제다. 이 청원은, 엄밀하게 말해서, 종말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들의 협력을 받아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 활동은 - 당신 통치의 결정적인 실현은 - 하느님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오고 전적으로 온다. 결국, 이 맥락에서 ‘오다.’라는 동사는 하느님 통치의 시작만이 아니라 그 통치가 점차 다져지고 영원히 수립되는 과정까지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서부터, 하느님의 통치는 실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느님 통치의 결정적인 수립은 미래에 속한다. 하느님이 지니신 지상권의 종말론적인 실현은 억압적인 지배로 이루어지지 않고, 옛 동방에서 왕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개념과 합치하여, 복과 안녕을 베푸는 모양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옛날에 이상적인 왕은 자기 백성의 목자, 아버지로 대우를 받았다. 그는 늘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세우려 노력하고, 자기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의 영적・물질적 행복을 걱정해야 했다(참조. 시편 72).

유다인들은 자기네 기도 속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원했다. 유다인의 그 기도와 주님의 기도를 비교해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유다인들의 기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동시에 예수께서 하느님의 통치를 알아듣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실 때 당신 영광을 찾지 않으셨다. 국가적・정치적인 면을 강조하지도 않으셨다. 다윗 왕조나 그 왕좌에 대한 관심도 없으셨다. 새로운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 하셨다. 예수께서 세우려 하시는 나라와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의 한계를 초월해 있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첫째 청원과 둘째 청원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긴밀하게 병행한다. 그 두 경우 모두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활동에 대하여 말한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일은 결국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와 합치하겠지만, 다른 각도에서도 조명해볼 수 있다. 즉 하느님의 통치와 당신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일은 사회와 세계 속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하느님의 통치와 그 이름이 거룩해지는 일이 결정적으로 그리고 충만한 권능으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청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앞에서 말한 두 청원에 마태오는 루카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셋째 청원을 덧붙인다. ‘하가세’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게네테토’라는 동사는 우선 하느님 자신을 내포한다. 여기에서는 하느님이 온갖 원수의 세력을 짓누르고 사악한 원수에 대항하여 당신 계획을 실현하시라고 간청한다(참조. 4,1-11). ‘텔레마’라는 낱말은 뜻 자체(‘텔레시스’)보다도 뜻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청원은 구원 계획의 기원과 그 실현 과정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 낱말은 ‘유도키아’ 또는 11,26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 원하신 뜻’과 합치한다.

셋째 청원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는 기원한다. 이 청원은 또한 기도를 바치는 사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 몸 바치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높으신 분의 결정을 운명론적으로 따르거나 체념하는 상태가 아니라, 마지막 때에 하느님만이 당신이 원하신 뜻을 실현할 수 있음을 알고 인정하면서도 온 힘을 기울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몸 바치는 상태를 가리킨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행하는 사람들이다(7,21). 예수님의 가족에 속하는 데 혈연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라야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된다(12,46-50). 하느님의 뜻을 준수하면서 도달해야 할 완덕의 단계는 하늘 나라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단계다. 하늘 나라에서는 천사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어김없이 수행한다. 시편 103,21에서는 그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의 모든 군대들아, 그분 뜻을 실천하는 신하들아.”

‘넷째 청원.’: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청원은 매우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이 맥락에서 열쇠가 되는 개념인 그리스어 ‘에피우시오스’라는 낱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양식’, ‘오늘 필요한 양식’, ‘아침에 필요한 양식’ 등 다양한 번역이 나와 있다. 

현재 주석가들 사이에서 아주 공통적인 해석에 따르자면, 올바른 번역은 “오늘 우리에게 아침 양식을 주소서.”일 것이다. 이 번역은 언뜻 보기에 수수께끼 같다. 그러나 그 ‘아침’이 오늘 다음에 오는 날뿐 아니라 위대한 아침, 마지막 완성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다. 따라서 이 청원에서 구하는 일용할 양식은 미래 하늘의 양식,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벌일 종말론적 잔치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모든 청원의 종말론적 방향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청원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해석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네 번째 청원을 오로지 물질적 양식을 구하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나머지 청원들과 거의 완전히 끊어지고 고립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의 양식’을 우리 양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준비한 당신 나라를 우리에게 유산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25,34). 그리고 앞으로 올 세상의 선익을 지체 없이 차지하려는 강한 열망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늘 - 이미, 지금 여기에서 - 우리에게 양식을 주소서.”라고 간구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빵’이라는 낱말은 현대 언어에서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낱말은 일반 양식,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음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과 더불어 다시 밥상에 앉겠다고 말씀하실 때, 당신은 종말론적 빵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26,29; 참조. 8,11-12; 루카 22,30). 그러나 하늘의 빵과 지상의 빵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세리들 및 죄인들과 한 밥상에 앉으실 때, 그 밥상에서 나눈 빵은 날마다 먹는 빵임과 동시에 미리 먹는 생명의 빵이었다.

‘아침에 필요한 빵’을 구하는 청원도 그와 마찬가지로 알아들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떼어놓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느님께 빵을 청하라는 당신 초대는 생활의 모든 차원을 껴안고 있다.

또 다른 해설가들은, 그와 차이 나게, 이 청원이 단순히 물질적 빵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끌어대는 이유는 ‘오늘’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 ‘아침을 위한’ 빵을 청하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께서는 당시 가장 가난하던 일용직 품팔이들의 처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으리라는 것이다. 그런 노동자들은 날마다 노동이 끝나면 다음 날 자기 가족을 먹이기 위하여 임금을 챙겨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만일 일당을 받지 못하면(20,1-6), 당장 자기 가족이 굶어야 할 판이었다. 따라서 앞에 나온 세 가지 청원이 분명히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에 따르자면, 첫째 해석이 물질적 빵에 대한 언급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궁핍하기 짝이 없는 형편에서 살아남기에 바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하느님이 그런 사람들을 당신 나라의 잔치에 영원히 초대하시기 바라는 열망을 더 절실하게 만들었으리라는 것이다.

‘다섯째 청원.’: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빚’(그리스어로, ‘오페일레마타’)이라는 낱말은 죄가 우리를 하느님께 대한 채무자로 만드는 것을 전제한다(병행 본문인 루카 11,4에서는 “저희의 빚” 대신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 낱말은 또한 예수님의 하느님께서 어질고 동정심이 깊은 하느님(시편 11,4),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하는”(탈출 34,7) 하느님이심을 전제한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용서를 받는다.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 130,4.7). 그러나 하느님은 무조건 죄를 용서하시지 않는다. 뉘우치고 회개해야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뉘우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이 말은 하느님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그만큼 당신 용서를 베푸신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찬 마음,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호소할 수 없다는 뜻이다(참조. 18,21-35).

집회서의 다음 대목(28,1-6)이 주님의 기도 가운데 나오는 이 청원을 아름답게 해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그분께서는 그의 죄악을 엄격히 헤아리시리라.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가지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여섯째 청원.’: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주 많이 퍼져 있는 의견에 따르자면, 이 마지막 청원은 똑같은 간청을 하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간청은 부정적인 형태로 되어 있고, 둘째 간청은 긍정적인 형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 안에 들어 있는 일곱 가지 청원을 찾아낸다는 구실로 그 두 가지 간청을 갈라놓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이 청원의 내용에 관해서, 주석가들의 주요 임무는 세 표현 및 낱말, 즉 ‘저희를 빠지지 않게 하소서.’, ‘유혹’, ‘악’에 대한 번역과 해석이 제기하는 난점을 해결하는 데 있다.

1. 그리스어 개념 ‘페이라스모스’는 ‘유혹’으로 본 ‘시련’을 가리킬 수 있다. 신약성경의 언어에서, 이 개념은 결코 금지된 어떤 악을 따르도록 충동질하는 내적 이끌림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 적이 없다. 오히려, 특히 신자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애쓰는 유혹자가 쳐 놓은 덫(루카 8,13; 묵시 3,10; 참조. 마태 13,19; 루카 18,8)을 뿌리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사탄이 가하는 시련을 가리킨다(1코린 7,5; 1베드 5,8; 묵시 2,10; 참조. 루카 22,31). 또한 하느님은 그 누구도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야곱 1,13)

두 가지 의미(‘시련’과 ‘유혹’)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는 순간에, 시련을 겪지 않게 해 주시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은 인생살이에서 당할 수밖에 없는 시련(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는 십자가에 해당하는 역경과 반대)을 피해보고자 하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현대 언어의 의미가 아니라 신약성경의 의미에서 알아들은 ‘유혹’에 대하여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2. ‘저희를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번역된 말은, 문자 그대로 알아들으면, ‘저희를 유혹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소서.’ 또는 ‘저희를 유혹에 들여보내지 마소서.’를 뜻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하신다거나 우리를 유혹의 함정 속으로 들여보내신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청원으로 우리는 우리가 유혹을 이겨내도록, 악에 동조하거나 악의 매력에 이끌리지 않도록 늘 도와주시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 누구도 시련과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 시련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 따라서 이 청원의 참된 목적은 유혹을 당하는 순간에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간청하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겟세마니에서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26,41)라는 경고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께서 수난하시는 시련의 절정에서, 제자들의 믿음은 위험에 처할 것이다. 그때 그들이 그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도에 매달려야 할 것이다.

주석가들의 합치된 의견은 예수께서 당신이 영광스럽게 나타나기 전에 마지막 유혹, 종말론적인 커다란 시련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 마지막 시간에, 사탄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흩트리려 할 것이며 많은 사람의 믿음에 시련을 안겨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크고 작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또한 믿음을 굳게 지키지 못한 자들의 배교를 불러올 커다란 시련이 들이닥칠 때 우리를 버리지 마시라고 하느님께 간청해야 한다(1베드 5,9).

3. 마지막으로, 마태오 복음서에만 13ㄴ절이 나온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정확한 번역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포네로스’라는 그리스어 개념을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낱말을 중성 명사로 알아들으면, ‘악에서 구하소서.’(다시 말해서, ‘악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구하소서.’)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남성 명사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올바른 번역은 ‘우리를 악을 행하는 악한 자에게서 구하소서.’가 될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을 위해서는 신약성경이 여러 차례 ‘호 포네로스’(악을 행하는 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이댈 수 있다(마태 5,37; 13,19; 요한 17,15; 에페 6,12.16; 2테살 3,3; 1요한 2,13-14; 3,2; 5,18-19와 어쩌면 마태 13,28도). 한편, 예수께서 펼치신 활동은 많은 경우 사탄을 대적하는 활동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구마(驅魔) 행위가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참조. 특히 마태 8,29). 그리고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하수인이라고 당신을 고발하는 바리사이들과 예수께서 벌이신 논쟁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12,22-29). 그런 뜻에서,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청원은 최후만찬에서 예수께서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요한 17,15)라고 간청하신 내용과 합치한다.


용서(6,14-15)

14-15절에서, 마태오는 자기가 특히 매력을 느끼는 용서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그 강조는 똑같은 주제가 나오는 ‘주님의 기도’의 청원(12절)을 다시 강화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없는 자는 자기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기대할 자격이 도무지 없다. 앙갚음을 하지 않고 용서하려고 마음먹는 일은 하느님의 용서를 얻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다. 인정사정없는 종에 대한 비유가 그 점을 생생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8,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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