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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4주일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3-19 조회수372 추천수1 반대(0) 신고

[사순 제4주일 가해] 요한 9,1-41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트리니티가 네오를 모피어스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들이 사는 세상이 잘못되어 있으며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러면서 네오 앞에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진실에 눈 감고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겠다면 ‘파란 약’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거짓의 세계’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게 됩니다. 물론 모피어스를 만났던 기억도 모두 사라집니다. 반면 거짓의 세계를 깨부수고 참된 진실을 마주하고 싶다면, 거기에 따르는 고통과 시련도 기꺼이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빨간 약’을 먹으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발견하게 될 진실이 지금보다 나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럴거라 믿고 끝까지 가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네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빨간 약’을 집어 듭니다.

 

한편, 장면을 좀 건너뛰어서 네오와 같은 함선에 타고 있던 동료 레이건은 다른 동료들을 팔아넘기기 위해 매트릭스 속 레스토랑에서 몰래 스미스 요원을 만납니다. 그도 예전에 ‘빨간 약’을 먹었기에 자기가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사실’이 아님을 압니다. 그럼에도 혀끝에서 느껴지는 고기의 맛과 그것이 주는 만족감은 너무나 생생해서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참 어려웠지요. 그래서 진실에 대한 모든 기억을 없애고 매트릭스 안에서 부와 명성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해준다는 스미스의 제안에 넘어가 동료들을 배신하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진실을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먼저 살펴볼 사람은 태생 소경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도 직접 언급하셨듯이, 하느님께서 이루실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해 기꺼이 ‘믿음’이라는 ‘빨간 약’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참된 믿음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보다 높은 믿음의 단계로 나아갈수록 그로 하여금 주님께 대한 믿음을 부정하게 만들려는 세력들과 싸워 이겨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첫번째로 마주한 적은 눈에 뻔히 보이는 분명한 사실을 근거 없는 억측으로 왜곡하고 부정하려 드는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는 ‘소문’이라는 이름으로 군중들 사이에 퍼져가는 ‘거짓’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다가 예수님께 은총을 입어 다시 앞을 보게 된 ‘그 사람’임을 당당히 밝힙니다.

 

그가 두번째로 마주한 적은 사랑하는 가족들의 ‘무관심과 외면’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어떻게든 예수님을 안식일 규정을 어긴 ‘죄인’으로 몰아가기 위해 그의 부모에게 압력을 가하자,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움에 빠진 그들이 아들을 감싸주기는 커녕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이라며 분명히 선을 긋는 냉정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자신을 매정하게 외면하는 냉정한 얼굴이었으니 그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을까요? 하지만 그는 그런 슬픔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님께 대한 진실을 선포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적은 철저한 ‘외로움’과 ‘고독’이었습니다. 그가 거듭된 엄포와 종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짓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자 바리사이들이 그가 ‘죄 중에 태어난’ 부정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를 회당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추방당함을 뜻했습니다. 더 이상 그를 같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기에 이제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철저히 홀로 외롭게 살아야만 하는 불쌍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힘들고 괴로운 그 순간 주님께서 그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구세주’를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는 겸허한 자세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이라는 빨간 약을 선택했기에 주님의 참된 모습을 알아보고 구원받게 된 것이지요.

 

다음으로 살펴볼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면 지금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 명예, 권력 같은 것들이 모두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부질없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불신과 고집이라는 ‘파란 약’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거짓선동과 모함으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진실을 계속해서 부정하다보면, 결국에는 사람들이 그 거짓이 진실이라고 믿게 될테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그들의 시도는 안타까움을 넘어 안쓰러움까지 자아냅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그 태생 소경이 사실은 소경이 아니었다는 허무맹랑한 헛소문으로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없던 일’로 만들어보려 했으나 실패하고, 예수님께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진흙을 만진 죄인’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해보려했으나 그 시도마저도 실패합니다. 그러자 자존심이 잔뜩 상해서는 시시콜콜 옳은 말만 하며 자기들 뜻을 따라주지 않던 그 소경에게 화풀이를 하는, 참으로 못난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게까지 한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에 눈이 멀어 하느님이 아니라 재물을 섬긴 ‘죄인’이라는 가슴 아픈 사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다는 슬픈 현실은 그대로인 겁니다.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손에 꽉 움켜쥔 불신과 고집이라는 파란 약을 버리고 회개하여 믿음의 빨간 약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지만, 그들은 세상이 주는 가짜 행복의 맛에 취해 주님을 거스르고 사탄의 노예로 사는 쪽을 택한 것이지요.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분께서 보여주신 진실을 끝까지 선택하여 구원에 이른 소경과,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뻔히 보이는 엄연한 사실조차 부정하며 끝까지 진실에 눈 감다가 결국 멸망에 이른 바리사이들. 우리는 이 두 부류 사이에서 드러나는 극명한 대비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대로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드는, 한쪽으로 치우친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누구나 다 그러려니’, ‘어차피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부분이라 어쩔 수 없으려니’하며 대충 넘어간다면 ‘눈 뜬 장님’이 됩니다. 눈 뜬 장님은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구원의 빛을 제대로 알아보고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현상과 본질을 제대로 구분하고 진실과 거짓을 올바르게 식별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주시기를, 또한 “예” 할 것은 “예”하며 따르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하며 배격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주시기를 기도 중에 청해야겠습니다.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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