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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29 조회수567 추천수4 반대(0) 신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 ... 윤경재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7.28)


  이 대목은 루카복음서에만 나오는 특수사료입니다. 루카 저자는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각별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 성모님에 관한 내용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성서학자는 루카 저자를 성모님의 화가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이 구절을 읽다보면 얼핏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소홀히 여기셨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루카 저자는 단어 하나를 잘 사용하여 의미를 반전시켰습니다. 그는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아는 뛰어난 언어 마술사였습니다.

 

  바로 28절에서 ‘오히려’ 라고 해석된 헬라어 단어 'menoun' 이 루카 저자가 만들어 놓은 암호입니다. “반대로”, “그렇기도 하지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단어를 새겨 보면 예수님께서 말하신 의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담긴 뜻이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행간을 살려 해석해보면,

 

  “당신 말이 맞습니다. 나를 낳고 젖을 먹여주신 저의 어머니는 행복하십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그분이 행복하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셨고 그 말씀을 지키신 분이기 때문에 더 행복하십니다.”


  루가저자는 마리아를  1장 38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신 분으로 적고, 48절에서는 그래서 행복하신 분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모두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시도해 봅니다만 여러 가지 이유로 중도에 포기하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 속의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어도 제 것이 못 되었기 때문에 초점 잃은 소리를 냅니다. (짖는 소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냥꾼이 들로 나가 사냥할 때 여러 마리의 사냥개가 먹잇감을 향해 멍멍 짖으며 달려갑니다. 그런데 끝까지 쫓아가는 녀석은 단 한 마리뿐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녀석들은 중간에 달려가다가 옆 개에게 묻습니다. ‘너 왜 뛰니?’, ‘응! 몰라. 저 녀석이 뛰기에 나도 덩달아서 뛰었어.’ 그러다가 힘에 부치면 한 마리씩 뒤로 뺀다고 합니다. 먹잇감을 눈으로 확인한 놈만 죽어라하고 쫓는다고 합니다.


  심심한 개 한 마리가 보름달 보고 멍멍 짖으면 온 동네 개들이 다 멍멍하고 짖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무신론자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에게 오해받는 것 중 한 가지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뚜렷한 방법이 부족하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불교나 힌두교로 찾아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몰라서 그렇지 훌륭한 방법이 이미 가톨릭교회 전통에 있었습니다. “무지의 구름”, “영신수련”, “갈멜의 산길” 등등이 그것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이 쓴 영성글을 통해서도 그 길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이런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의 감미로운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분을 찾다가 지쳐 버린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저 좋은 지향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영원한 탄생을 받기 위하여 치열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보통 인간은 감각을 통하여 우리를 둘러싼 외부 세계에서 지식을 얻습니다. 그것을 인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더 귀중한 '영원한 탄생'은 내면에서 솟아나오며 일반적인 인식의 과정을 역행합니다.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깨닫기 때문에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이것을 오히려 “무지(無知)”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즐겨 분석하는 이성적 사고로는 하느님을 상상할뿐입니다. 막연히 ‘이것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할 뿐입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본성 안에다 하느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마련하는 자에게만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신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준비해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도록 내버려두기만 하면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쉬는 것, 행복하게 되기를 배우는 것, 걱정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


  이것이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내놓은 처방입니다. 그가 말하는 쉬는 것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될 만큼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정신을 고요하게 하려면 육신도 고요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활동을 정지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태풍의 눈처럼 외부에는 강력한 소용돌이가 있으나 그 본질은 고요합니다. 그러면 행복과 평화가 찾아오고 모든 근심 걱정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자신을 비우고 사물에 무지(無知)해 질수록 하느님께서 활동할 여지가 많아집니다. 마리아께서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 뜻이 바로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맡긴 것이고, 자신을 비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먼저 영적으로 하느님을 낳지 않았다면 결코 하느님은 육신으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성자를 낳지 않는다면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신 것이 나에게 무슨 득이 되겠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는 이처럼 사람의 생각을 비우고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는 이입니다.

 

 28.All I Ask Of You / Sarah Brightman & Steve Ba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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