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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의 2008년 4월 여행기 제14탄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29 조회수472 추천수8 반대(0) 신고
 
 
 
유럽 여행기 - 미쿨라세 성당,프라하 성,비투스 대성당외...
 
 
프라하에서의 둘째날입니다. 조금 늦었지요? 왜냐하면 프라하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오는 비행기가 아침 7시밖에 없어서, 이 비행기를 타느라 새벽(이곳 시각으로)에 여행기를 올릴 수가 없었네요. 아무튼 늦게라도 여행기 제14탄을 올리도록 합니다.

프라하 한인공동체와의 주일미사 전, 저희는 그렇게 아름답다는 프라하를 조금이라도 느끼기 위해서 미쿨라세 성당과 아기 예수님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첫 번째 시작은 미쿨라세 성당입니다.


프라하 바로크 양식의 정점인 건물로 일컬어지는 교회입니다. 원래 지어져 있던 같은 이름의 고딕 양식 교회가 헐린 후 1704년부터 1756년에 걸쳐 딘첸호퍼가 건설했다고 하지요. 한데 모여 있는 수많은 대리석이 평면의 곡선과 어우러져 교회 내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바로크의 거장으로 추앙받던 딘첸호퍼가는 남독일 출신의 건축가 일가입니다. 크리스토프와 아들 킬리안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에 걸쳐 보헤미아에서 활약했습니다. 이들 부자는 프라하에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이 교회는 그 중에서도 대표작(구시가 광장의 성 미쿨라세 교회는 아들 킬리안이 18세기에 개축한 것)입니다. 네이브 천장의 프레스코와, 성 미쿨라세의 제단, 황금 설교단 등 볼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황금 천사들로 장식된 오르간을 1787년에 모차르트가 연주했다고 하네요.




이렇게 멋진 성당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성당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컨서트 등의 연주하는 장소로만 쓰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성당이 프라하 시내에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많은데 비해 성당이 없어서 그렇게 고생하는 본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성당이 있어도 신자들이 없어서 상업적인 용도로밖에 쓰이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이제 저희는 그렇게 유명하는 아기 예수님 성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성당을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그곳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그대로 옮겨 봅니다.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Cordoba)와 세비야(Seville) 사이에 있는 과달키비르(Guadalqivir) 지역에는 옛적에 스페인 땅에서 유명했던 수도원이 있었는데 회교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어 그후에는 싸늘한 페허 위에 몇 명의 수도자들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아기예수님에 대해 신심이 깊은 요셉 수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비질을 하고 있을때 왠 아기가 나타나.. 요셉수사님 성모송을 암송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수사님은 곧바로 성모송을 암송했고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하며 이어 나갔는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에 이르렀을 때 그 아이가 갑자기 "그게 바로 나예요" 라고 외쳤답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아이는 바로 아기 예수님이셨던 것이지요. 그러자 곧 그 아이는 사라져버렸고 그는 무척 섭섭했습니다.

이후 다시 나타난 아기예수는 수사에게 아기예수성상을 만들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완성하고 그 자리에서 숨집니다.

아기예수상은 성당에 모셔지고 그 날 밤 수도원장의 꿈에 나타난 요셉수사는 도나 이사벨라 후작 부인이 와서 이 천상 아기를 모셔갈 것이고 그리고 그녀는 이를 곧 따님인 마리아 만리케쯔에게 결혼 선물로 주게 될 것이므로 여러분은 이후에도 언제나 사랑과 존경을 지니고서 이 아기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정말 이 같은 일이 생기고 도나 이사벨라의 딸인 마리아 만리케쯔(Maria Manriquez)보헤미아의 귀족, 브라티슬라 폰 페른스타인(Vratislar von Pernstein)과 결혼할 때 그녀의 가문에서 이미 ''오랫동안 기적을 행하는 아기'' 로서 공경되며 귀중한 가보로 전해지던 이 아기 예수상을 오래 전에 요셉 수사가 예언한 대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아 시댁이 있는 보헤미아로 가져왔답니다.

마리아 만리케쯔는 그것을 다시 자신의 딸, 마리아 폴리세나(Maria Polixena)가 영주 아달베르트 폰롭코비츠(Adalbert von Lobkowitz)와 결혼할 때 선물하였습니다. 그런데 1623년 남편이 죽음으로써 과부가 된 후에도 폴리세나는 돈독한 신앙생활과 이웃사랑으로 생애를 보냈는데 그녀는 특히 프라하 지역에 위치해 있는 승리의 마리아 가르멜 수도원 수사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후 작센 군대가 성당을 약탈하고 아기예수는 팔이 부러진 채 방치되었습니다.

9년의 시간이 흐른후 씨릴이 사제가 되어 돌아오면서 아기 예수상을 찾고는 너무 슬퍼하고 있을때 "나를 불쌍히 여기세요. 그러면 나도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내 손을 되찾아 주세요. 그러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평화를 주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경배하는 것처럼 나도 여러분들을 찾아가겠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수도원장을 찾아가 성상을 고치게 해달라고 청원 하고 이는 곧 받아들여집니다. 성상은 대제대의 감실 위에 모셔져 공경 받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수도 공동체 식구들뿐만 아니라 많은 주민들도 이 은총의 아기에게로 나아오게 되었답니다.

더욱이 씨릴 신부 덕택 에 아기 예수님의 대제대 뒤에 자신의 경당을 가지게 되었고 예수님의 성명 축일에 이 경당이 축성되면서 그 이후 매년 1월이면 ''은총을 풍성히 내려주시는 프라하의 아기 예수님'' 축제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655년 4월 4일에는 높은 신분의 귀족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프라하의 부주교 집전으로 성대한 대관식을 가졌습니다. 또한 수많은 수도원들이 이들의 신심을 본받았고 이렇게 해서 온 세상에 아기 예수님 공경이 급속히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12시에 있을 프라하 공동체와의 미사를 위해서 성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상당히 오래된 성당인데, 그곳 본당 신부님(체코신부님)께서 프라하 한인공동체 미사를 매주일 봉헌해주신다고 하네요. 그런데 저희들이 방문해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명동성당보다도 큰 성당에서, 기도 소리가 울려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앞선 미쿨라세 교회에서 받은 아쉬움을 또 다시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요. 어제 강의때 시간이 부족해서 말 못한 것이 있을 것이라면서 억지로 시킨 강론을 위해 강론대에 섰는데, 목소리가 너무나 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론대에서 멀리 떨어져 강론을 할 수밖에 없는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지요. 나중에 알고보니, 이러한 성당에서는 최대한 느리게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워낙 말이 빨라서…….

그리고 미사 후에 먹은 비빔밥. 너무나 맛이 좋았습니다.








식사 까지 마친 뒤, 저희는 프라하 관광을 나섰습니다. 전문 가이드인 유딧 자매님께서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로 알찬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지요.

먼저 프라하 성입니다.

9세기에 보르지보이 왕이 건설한 성에 기초하여 14세기의 카를 4세 시대에 지금의 모습으로 거의 정비되었다고 합니다. 16세기 말에 함스부르크가의 루돌프 2세가 프라하에 궁정을 둠으로써 성이 번성하여 전성기를 맞이했지요. 그러나 나중에 마티아스 왕이 궁정을 다시 빈으로 옮김으로써 성은 쇠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그후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대대적으로 개축되기도 했지만 점점 쇠퇴해 갔지요.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성립하면서 대톨영 관저가 되었으며, 지금도 구왕궁의 건물은 대통령의 집무실과 영빈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동서로 길게 펼쳐진 이 성의 입구는 흐라트차니 광장에 면한 서쪽 정문과 말라스트라나 쪽의 동문, 성 정원쪽의 북문이 있습니다. 각문에는 위병 2명씩이 지키고 있으며, 1시간마다 교대하는 것 같습니다. 정문 양 옆의 싸우는 거인상은 이그나스 플라제르의 18세기 작품이지만, 지금 있는 것은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복제품이랍니다.

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광장은 제1정원으로서 국빈이 오면 이곳에서 맞이한답니다. 제2정원은 17세기에 마티아스 왕이 지은 세련된 문을 거쳐서 갑니다. 옛날에는 해자 입구에 있던 것이지만, 18세기 말에 성을 다시 지을 때 마티아스 문이 이곳으로 옮겨져 건물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현재 이 건물은 대통령 공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2정원에는 17세기에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분수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대통령 공저인데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울 뿐입니다.





프라하 성의 제2정원에서 제3정원으로 빠져 나가면 정말로 어마어마한 비투스 대성당이 나타납니다. 프라하를 대표하는 교회로 프라하 성 안의 최대 볼거리이지요.

926년에 바츨라프가 지금의 장소에 원형의 교회 건물을 지은 것을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새로 지었습니다. 고딕 양식의 현재 모습이 갖추어진 것은 14세기 카를 4세 시대의 일입니다. 프랑스의 건축가 마퇴외 드 아라가 동쪽 예배당 8채를 완성했고, 그가 죽은 후 23세이던 독일 출신의 건축가 페테르 파를레르시가 생애를 바쳐서 성가대석, 내진의 아치 천장 등 현재의 동쪽 절반을 완성시켰답니다. 그 후에도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 건설하다가 192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완성하는 성당. 빨리 빨리를 외치는 우리들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네요.

완성된 대성당은 전체 길이 124m, 너비 60m, 천장의 높이 33m입니다.

정면 입구 문 위에는 1927년에 완성한 장미창이 있는데, 사용된 색유리는 무려 2만 6740장에 달합니다. 성당 안은 압도될 만한 넓이로, 높은 볼트 천장을 장식한 리브가 유난히 아름답습니다. 파를레르시는 50년의 세월 동안 이 견고한 아치를 만들었다고 하며, 14세기 프라하의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20세기 초에 건설된 서쪽아일에는 좌우로 6채의 경당이 있으며, 왼쪽 3채 가운데 가장 뒤쪽 경당 창에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 ‘성 그리스도와 성 메토디우스’는 무하가 그린 걸작입니다.

중앙 제대 오른쪽 옆에는 성 얀 네포무츠키의 커다란 묘가 있고 그 위에 장식된 조각상은 은빛을 발합니다. 이를 위해 사용한 은만 해도 2톤에 달한다고 하네요. 얀 네포무츠키 성인은 고해성사의 비밀을 지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밖에도 많은 볼 것들이 성당 내에서 찾아 볼 수가 있어요. 그것들을 한 번 함께 둘러 보시지요.











다음은 비투스 성당 꼭대기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287개의 계단을 힘들게 올라갔지요. 가이드가 올라가 보라고 해서 올라갔는데.. 정말로 힘들더군요. 그래서 가이드에게 따졌어요. 왜 올라가게 했냐고요... 그랬더니만 너무나 팔팔해보여서 올라가라고 했다고 하네요.





오늘은 내용이 상당히 많네요. 원래 프라하 전체가 문화유산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네요. 조금 길더라도 이해해주세요. 그럼... 이제 프라하의 구시가입니다.

구시가 광장은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입니다.






이제 구시청사.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서 왜 그런가 했더니만, 장치 시계 때문이라고 하네요. 1410년에 만들어졌다는 이 장치시계에는 하나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요. 이 장치시계를 만든 사람은 천재로 이 멋진 시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에서 자기네 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시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을 했데요.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이 시계를 갖고자 하는 욕심에 이 천재 과학자의 눈을 멀게 합니다. 이 천재 과학자는 너무나 억울했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기가 만든 이 걸작품을 한번만 만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소원으로 시계 뒤쪽을 들어간 이 사람은 시계를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부속 하나를 빼서 시계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1410년에 만들어진 이 시계는 또 다른 과학자에 의해서 1490년에야 다시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네요. 사람의 욕심이란... 이렇게 잔인하지요.

장치 시계 부분에서 해골은 죽음의 신을, 악기를 가진 남자는 번뇌를, 거울의 청년은 허영을, 금자루를 가진 남자는 욕심을 상징한답니다. 그래서 매 시마다 종이 울리는데, 그때 해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인형은 고개를 젓는다고 합니다. 즉, 해골은 죽음을 인정하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인형들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젓는 것이라고 하네요.



광장 한 가운데에는 얀 후스의 군상이 있습니다. 얀 후스프라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후스는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통렬하게 비판하다가 로마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화형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에 순교자로 추앙받습니다. 이 군상은 1915년, 후스 사망 500주기를 기념해서 세운 것입니다.



마지막 카렐교입니다. 블타바 강에 놓은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현존하는 다리는 1357년, 카를 4세의 명에 따라 성 비투스 대성당을 지은 페테르 파를레르시의 지휘로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완성된 때는 바츨라프 4세의 통치 기간인 1402년입니다. 강 속에는 12개의 교각이 떠받치고 있고 16개의 아치가 다리 아래에 늘어선 이 석교는 너비 9.5m, 길이 516m로 유럽 중세 건축의 정점에 있는 걸작입니다.

다른 위에 있는 30기의 성인상도 볼거리입니다. 다리가 건설될 당시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17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있는 것은 다 가짜라고 하네요.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는 저희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소원을 들어준다는 벽화입니다. 그래서인지 엄청나게 사람들이 몰려 있고요... 벽화가 하얗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글쎄 지나가다가 Crag David를 만났답니다. 글쎄 프라하에서 뮤직비디오를 찍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Crag David를 직접 만나게 되는 영광도 얻었네요.



와... 너무나 힘든.... 관광이었습니다. 이제 저희의 여행도 모두 끝났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유럽교회의 현실입니다. 아름다운 성전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비해서 사람은 없다는 것. 아름다운 성전이 주님을 위한 공간이 아닌,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과연 무엇을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까요? 지금 나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세속에 물들어서 세상과 타협하여 주님을 실망시켜드리는 나의 모습이 아닌,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지향하면서 더욱 더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하여 봅니다.

지금까지의 여행기.. 부족하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희는 내일 비행기를 타고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29일에 출발해서 30일에 도착하네요. 처음에 7시간을 벌었다고 좋아했는데, 이제 7시간을 다시 내놓아야 한답니다. 그래요. 우리가 시간을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내가 받은 모든 것은 주님께 되돌려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겸손한 삶 그리고 주님을 닮은 사랑의 삶을 지향하여 봅니다.

이제 여행기는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5월 1일부터 다시 새벽을 열며 묵상글로 여러분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5월 1일부터 새벽묵상글과 아침문자 그리고 새벽 방송이 정상적으로진행되겠습니다.

그동안 제가 없는 동안 새벽카페를 지켜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Ray Jung - Arirang on Green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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