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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식처인 인간관계/영적성장을 위한 감성수련 문종원신부
작성자조연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03 조회수545 추천수7 반대(0) 신고



 

*안식처인 인간관계 *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하느님을 알지못하기 때문입니다(1요한 3,1)
 

하느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서로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낙원에서

죄로 떨어져 갈라졌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다는 깨달음입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인간관계를 안식처가 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 친구와 친구, 배우자와 배우자, 친척과 친척

어느 관계이든 상관없이, 각 관계들은 서로가 존중하고 존경하면서

직분을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목적을 가지고 계획하셨습니다.

어떤 관계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존엄성을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많은 관계들이

하느님께서 목적하신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성을 지닌 자만심은 유익이 되기보다는 훨씬더 해롭습니다.

이것은 공포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곧,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 안되지! 내가 맺는 관계들이 깨질 수 있어.

나는 거부를 당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알 수가 없어!

이 때 우리는 평화와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되고

급기야 거부로 말미암아 쇠약하게 됩니다.

그 예를 다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한 아내가 만약 자신이 진실로 생각한 것을 남편에게 말한다면,

남편이 자신을 떠날 것이라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남편이 거부한다면 도움도 희망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욕구들을 억압합니다.

 

 한 어머니가 자녀들을 너무 강하게 키우게 되면,

자녀들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녀는 자신의 방식에 타협점을 찾고 평화를 유지합니다.


 종업원이 만약 자신이 다른의견을 낸다면,

그의 상사가 자신을 견책할 것이며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사례를 통해서, 거부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게 합니다.

만약 내가 어떤 사람을 실망시키면, 그것은 나의 생존을 위태하게 할 것이다.”

한 예로 어떤 아이가 어머니에게 자신을 못살게 굴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면

고통이 따르고 비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거부를 해석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초점을 맞추고

힘을 실어 주는 과오를 범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또한 나는 나 자신을 신뢰할 수가 없어 라는 말을 전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신뢰의 결핍은

그들에게 자신의 결점을 비난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생각한 데로 환경을 그렇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성취의 예언입니다.

 

 과거를 돌아볼 때,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었던 두려움에 대한

많은 이유들을 발견할 수있습니다.

많은 관계가 진정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에는 어떤 것을 잘못했을 때,

우리를 거부하는 많은 판관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느낌을 우리안에 가두는 것이 더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방식으로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인해 화를 쌓아나가게 되고 그것이 삶을 좀먹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구들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나의 감정들은 신뢰할 만한가?”라고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기주의자나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람들이 우리의 느낌들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합의 내용에 복종하기보다는

우리의 내면의 신뢰감을 더 확고하게 해야 합니다.

 

 진실한 자기 주장은 우리가 합당한 욕구를 지닌 합당한 사람이라는

신뢰심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거부에 의해서 우리가 끌려 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일단 우리가 자신의 주장에 더 신뢰를 두는 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의 거부에 덜 영향을 받는다면,

욕구들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어떤 변화들을 인지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변명을 늘어 놓지 않고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의 느낌을 무시할 때,

우리는 힘의 논리를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확고하게 당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성을 내는 것에 관해서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진정한 느낌들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곧, 빙빙돌려서 말하기보다는 자신의 느낌들에 관해서

명백하게 이야길 할 수 있습니다.

곧, 거부에 대해 덜 걱정하고 자기 주장에 더 신뢰를 둔다면

우리의 화를 조절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거부를 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보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솔직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건설적인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을 할 때,

우리는 확고하게 설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관계는 안정감을 불러옵니다.

이것은 신뢰, 수용 그리고 봉사정신을 확립합니다.

이 이상이 이루어 질 때, 두려움은 무시해도 좋습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관계가 신뢰, 수용 또는 봉사보다는

다른 것을 포함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속임수, 생색내는 태도 또는 이기적인 마음을 경험함으로 해서

자신을 방어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어는 화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게끔하는 규범이 됩니다.


 두려움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참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친구에게 자신이 저지른 중요한 실수에 관해서 말했을 때

후에 논쟁을 벌일 일이 생겼을때

친구가 자신을 거슬러서 그것을 사용했을 때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될 때 우리는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기 보존 본능은 고속으로 속도를 높이고

우리는 냉소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동기를 해석하게 됩니다.

이것은 관계를 맺는 태도에 있어서 비관주의로 몰아가게 되고,

심지어 자신을 감금하기도 합니다.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어 두려울 것 없사오니

인간이 감히 이 몸을 어찌 하리이까?”(시편 56,4).

거부되거나 비판받거나 무시되었을 때를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약함 그리고 모든 것을 받아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관계와 환경으로부터 오는 모든 유혹들에서

우리를 인도하실 수있다는 깨달음을 통해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감정을 확고하게 하실 수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한 아버지가 십대 아들이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화를 불러 일으킵니다.

러나 그는 하느님께서 교육하시는 방법은 사랑과 온화함을 띤

확고함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것을 식별하면서,

경건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한 아내가 남편이 자신에게 흥미를 잃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마 다른 여자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전전긍긍하기보다는,

그녀는 하느님께서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짐을 허락하시지 않는 다는

깨달음으로 확신을 갖습니다.


 한 여자가 사교적인 면에서 수줍음을 많이 탑니다.

그러나 그녀의 자존감을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하느님께 맡깁니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사교적으로 귀찮은 존재가 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과

그녀의 모든 면을 받아들여 주신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한 남자가 거침없이 비판하는 위협적인 상사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오직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 상사가 여전히 비판한다고 해도 너무 압도당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무에 집중할 수 있다고 다짐합니다. 


 하느님께 힘을 청하는 것은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감정들을 인간에게 맡기느냐 아니면 하느님께 맡기느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첫 번 째 모델인 부모로부터 경건한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권능을 붙들려고 그렇게 많이 투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부족하더라고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방향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더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구원의 메시지를 개인화 할 수있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그녀를 위해 그것을 쓴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을 주신 하느님의 특성에 대해

폭넓게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동료들과 위험을 감수할 수 있지만 자신을 알리고

그들로부터 사랑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1요한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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