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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아기는 광야이다 [수요일]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08 조회수442 추천수4 반대(0) 신고

각 개인이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세상은 부조리와 불평등으로 가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자기 중심적 (혹은 인간 중심주의) 사고는 정당한 시각이 아니며 그 근거는 세상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진리에 함축되어 있다. 곧 세상은 하느님의 질서에 맞추어 돌아가지 내 질서에 맞추어 돌아가지 않는다는 자명한 진리가 설파되고 있는 것이며 이에 욥은 항변을 그친다.

욥은 창조주 앞에 비로소 자신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고 이런 깨달음이 욥의 '회개'였다. 욥은 이제 '귀로만 들은 하느님'을 알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진정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다시 구축되는 순간이다. 이후 욥은 이전보다 더 많은 복락을 누리게 되는데 결국 고통의 시간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필수적 단계로 작용했던 셈이다.

욥은 자신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받고 있으니 세상과 하느님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고발한다. 그러나 하느님과 만남을 통해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경험과 이성만을 앞세운 이기적인 판단이요 오만이었음을 깨닫고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온 '귀로만 들어 왔던 분'이었음을 고백한다.

'귀로만 들어 왔던 하느님'은 '내'가 아닌 '그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직접 체험이 아닌) 체험된 하느님일 뿐 실상 내 실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존재일 수 있다.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실제의 삶이 행복과 구원으로 충만되지 않는 이유는 그저 남들의 신앙과 화려한 이론에 의해 소문으로만 전달된 하느님을 알고 있을 뿐 자신의 내면에서 체험되고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삶의 해방과 자유가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한 진정한 관계성'에 숨어 있음을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이야말로 삶의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근원적 체험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기 위해 사막(광야)으로 갔다. 사막에서는 사방 어디에서나 늘 똑같은 그림만 보일 뿐이고 정적이다. 그런데도 광할한 사막은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빛을 발한다.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예감이 사막에서는 우리 자신의 제한성과 연약성을 만난다. 이런 긴장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사막(광야)을 발견한다.

안토니오 성인을 포함하여 초기의 수도승들은 단지 물질적 쾌락을 상대하지 않기 위하여 또 자신들의 '세상' 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 기대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더 깊고 풍요로운("버려라") 실존에 '깨어 있기 위하여' 사막으로 간 것이다.

토머스 머턴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막의 교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자아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교부들은 세상 속에서 만들어진 자아를 완전히 거부하였다. 그들은 알려져 있지 않은 또한 자유롭게 선택하는 하느님의 길을 찾았다. 그 길은 사람들이 앞서 그려놓은 길,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길이 아니었다. 교부들은 다른 사람이 고정시켜 놓은 '주어진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홀로 발견할 수 있는 하느님을 추구했다"

고비 사막을 넘었던 메스너 역시 사막에서 숨처럼 단조롭고 너무나 고요하여 물을 마시거나 귀를 기울이기 위해 멈출 때마다 그 소리에 놀라곤 하였다. 그곳에선 고요와 드넒은 대지가 마치 시간을 삼켜 버린 것같았고 귀청을 통해 들리는 소리를 통해서만 대지의 살아 있는 움직임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예전보다 더 나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마음 속에 도사린 사막은 무덤과 같다. 무감각한 삶은 온갖 소비주의 문화에 길들여진 채 번잡하다.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은 미로에 가로막힌 채 우리 영혼은 방황한다. 충만한 삶이란 그저 먹고 마시며 들떠 있는 소란스러움이 아니다. 충만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자아의 깊은 부분을 살아내는 것이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마르코서 6, 48 - 49>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는 말씀은 우리한테도 적용시켜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에 이르는 어떤 길도 제시하지 않고 대신에 하느님을 믿고 당신(예수님)을 믿을 것을 요구하신다. 그래야만 진정한 평화가 주어진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의 시발점으로 삼았지만 이제부터는 죽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야곱의 우물에서 참조>

   - 아빠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는 아기는 광할하다. 아기는 광야이다 -

사막에서는 사방 어디에서나 늘 똑같은 그림만 보일 뿐이고 정적이다. 그런데도 광할한 사막은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빛을 발한다.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예감이 사막에서는 우리 자신의 제한성과 연약성을 만난다. 이런 긴장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사막(광야)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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