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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봉헌생활의 축복" - 11.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9-11-08 조회수447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11.8 연중 제32주일                                      
열왕 상17,10-16 히브9,24-28 마르12,38-44

     
 
                                                     
 
 
 
"봉헌생활의 축복"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온 산마다 붉게 노랗게 하늘 사랑으로 타오르는 가을 단풍들,
봉헌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배 열매들, 단풍잎들 다 떠나보내고 가난하게 서있는
텅 빈 충만의 배나무들 역시 봉헌생활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그대로 복음의 가난한 과부가 연상됩니다.
 
우리 수도자들 역시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봉헌기도를 올렸습니다.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하느님께 드려라”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봉헌기도를 드리며 자신을 비울 때
샘솟는 생명, 샘솟는 기쁨, 샘솟는 행복입니다.
 
이 기쁨, 이 행복에 사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비판을 받는 율법학자들과
헌금함에 풍족한 가운데서 얼마씩만 봉헌하는 부자들,
그리고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은 가난한 과부 중
행복지수는 누가 제일 높을 까요.
 
두 말 할 것 없이 가난한 과부일 것입니다.
 
결코 외적 자리와 소유와 함께 가는 행복지수가 아닙니다.
 
아마 율법학자의 가슴은 허영으로,
부자들의 가슴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가난한 과부의 가슴은
하느님 향한 사랑, 믿음,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 부자이며 행복한 사람이겠는지요.
 
과연 여러분의 가슴은 무엇으로 차 있는지요.
 
채우라 있는 가슴이요 단지 무엇으로 채우는가가 문제입니다.

이래서 봉헌생활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예외 없이 봉헌생활에로 불림 받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기쁘게 끊임없이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봉헌생활입니다.
 
보십시오.
온통 하느님께 받은 선물이 아닙니까.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을 때
저절로 끝없이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축복에 대한 당연한 감사의 응답이 봉헌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봉헌이 아니라
평생 매일 계속되는 봉헌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만이 봉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몸, 시간과 재능, 물질을 이웃과 사랑으로 나누는 것 역시
하느님께 바치는 간접적 봉헌입니다.
 
끊임없이 안팎으로 버리고 비우는 봉헌을 통해
가난과 겸손, 마음의 순수에 이릅니다.
 
봉헌으로 늘 비울 때 비운 자리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즉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 믿음, 희망,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봉헌생활의 모범은 바로 주 예수님이시며
우리 봉헌생활의 결정적 표지가 바로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이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는 주님과 함께
우리 모두를 봉헌함으로 죄를 용서 받고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들입니다.
 
제가 미사 시 성찬전례 중
온 정성을 다해 바치는 예물 준비 기도문입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문입니까?
 
빵과 술과 더불어 우리의 전 존재를 찬미와 감사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미사시간입니다.
 
아름다운 봉헌생활의 꼴을 잡아주는 미사 은총입니다.


먼저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이,
진심이 담긴 자발적 숨겨진 봉헌이 제일입니다.

이게 하느님께서 즐겨 받아주시는 진정한 봉헌입니다.
 
오늘 1독서의 사렙타 과부와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진정 봉헌생활의 모범입니다.
 
과부 자체가 가난의 상징인데
여기에 가난까지 겹치니
정말 믿고 바랄 것은 하느님뿐이 없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언자 엘레야의 요구가 점입가경입니다.
 
도대체 사렙타 과부의 처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듯합니다.
 
땔감을 줍고 있는 과부에게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부탁하자마자
염치도 없이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거듭 청합니다.
 
아, 이게 바로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시험이었습니다.
 
군말 없이 순종하는 과부에게 거푸 부탁하는 엘리야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아주 깊은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사렙타 과부를 구원하시기 위해 파견된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를 통해 하느님을 대접한 사렙타 과부였습니다.
 
사렙타 과부가 엘리야의 명령에 군말 없이 순종하여
엘리야부터 먼저 챙겨드렸을 때 하느님의 샘솟는 축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신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봉헌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자발적 기쁨의 봉헌입니다.
 
쓰고 남아서 봉헌이 아니라
우선 하느님께 봉헌했을 때 축복입니다.
 
시간과 정력, 물질의 안배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할 것 다하고,
쓸 것 다 쓰고 바치는 형식적 봉헌은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바쁘고 부족한 중에도
우선 하느님 것부터 챙겨
정성과 진심을 담아 기쁘게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가진 것이 없어 봉헌을 못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시간, 가장 좋은 것들을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모두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씩 넣는 부자들과는 달리
가난한 과부는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가진 것 전부를 바치는 과부의 숨겨진 봉헌이,
겸손한 봉헌이 참 아름답고 자유로워 보입니다.


주님의 눈길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시는 하느님의 눈길입니다.
 
하느님 피해 갈 곳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나, 주님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
 
또 히브리서 다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도 부자들이나 과부는 꿈에도 상상 못했겠지만
주님의 눈길은 이들 모두의 마음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의 눈길에 잡힌 율법학자들의 모습이 또 우리에게는 경종이 됩니다.
 
남들이 보이라 긴 겉옷을 입고 다니며,
장터에서는 인사 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  자리를 탐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는 모습의 우리는 아닌지 반성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영의 실속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우리 요셉수도원 성전의 봉헌함에는
참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을 합니다.
 
봉헌함을 열 때 마다 무수히 나오는 천 원짜리를 보면
저절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를 다 성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눈길은 과부에게서
이 헌금을 사용할 성전 사제들에게 향할 것입니다.
 
분명 주님은 이 헌금의 사용을 주시할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것이 그 다음 성전 파괴의 예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르꼬 13장 1절에서 웅장한 성전 건물에 감탄하는
마르꼬13장 2절의 제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것이다.”
참으로 종교가, 성전이 세상의 공해가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산소가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 역할을 못했을 때
하느님은 종교개혁의 몽둥이로,
프랑스 혁명의 몽둥이로,
또 공산주의의 몽둥이로 교회를 쳤습니다.
 
이에 대한 대오각성이 2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주님의 눈길은 가난한 과부와 더불어
성전의 종교지도자들을 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삶만 봉헌이 아니라 죽음도 마지막 봉헌입니다.
 
아름다운 봉헌의 삶을 살아야 아름다운 죽음의 봉헌입니다.
 
오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가난한 과부처럼,
우리의 전 존재를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 봉헌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봉헌으로 비워진 우리 마음에
주님은 당신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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