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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용되고 남용되는 '하느님의 뜻'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31 조회수859 추천수16 반대(0) 신고
 

 

 

말씀: 이사 7,10-14; 8,10ㄷ; 히브 10,4-10; 루카 1,26-38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아하즈에게 무엇이든지 표징을 청하라고 한다. 

그러나 아하즈는 주님을 시험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청하지 않겠다고 답한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의 말을 듣고 칭찬은커녕

오히려 하느님을 성가시게 하느냐고 야단을 치면서 강제로 표징을 주었다.

 

아하즈는 영문을 몰라 혼란스럽고 한편 억울했을 것같기도 하다.

그동안 하느님을 시험하고 표징을 요구하는 일은 불신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들어왔다.

그러기에 자신은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언제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하고,

표징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하시더니

언제는 또 싫다는 표징을 굳이 주겠다고 하시니 

이렇게 어려운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제2독서에서는 그 짧은 대목에 우연인지 하느님의 “뜻”이라는 단어가 무려 세 번이나 나온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예수님의 말씀)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을 서간의 작가가 다시 반복)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히브리서의 저자의 말)

 

우리들도 걸핏하면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산다.

 

 “이것이 하느님 뜻이겠지요?”

“하느님 뜻에 맞춰 살아가렵니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은 신앙인의 기본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분명히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 그래서 그것이 하느님 뜻인 줄 알았던 것들 속에도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악이 숨어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나에게는 선인데,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악이라 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그것이 하느님 뜻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느님 뜻대로 하니까 다 잘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하느님 뜻이 아니었나보다고 즉시 말을 바꾸기도 한다.

그만큼 헷갈리며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또 한편 자기의 뜻을 하느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느님 뜻을 헷갈리지 않고 쉽게 알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하느님 속은 정말로 알 수가 없다.

아니, 알 수가 없어서 하느님이다.

인간의 좁은 머리로 다 파악한 하느님이라면, 그는 참하느님이 아니다.

하느님 뜻을 다 터득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느님의 뜻은 어떤 특성이 있을까? 혹시 그 특성을 알면 식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뜻의 특성이 어렴풋이 드러나며, 

또한 그분의 뜻을 찾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아하즈는 표징을 구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에 더 큰 신뢰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참뜻은 아하즈에게 표징을 주고자 하는 것이고,

그 표징은 바로 그 가문, 아니 온 인류에 구세주를 주시겠다는 엄청난 약속이 담긴 것이었다.

 

그런데 아하즈는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던 섣부른 지식 때문에 즉각 하느님의 뜻을 거절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하느님을 성가시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그가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하느님은 억지로라도 표징을 주셔야 했던 것이다.

 

 그처럼 하느님의 뜻은 당사자들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자신의 뜻과는 반대가 되는, 뜻밖의 뜻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신의 뜻과는 여엉 반대가 되는 하느님의 뜻을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도 듣고 있다.

 

그 여인은 천사의 인사말을 듣고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한다.

하느님의 뜻을 파악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의 태도는 위의 아하즈의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곰곰이 생각하고 자세히 경청하고 질문도 한다.

이는 자신이 그 일을 수용하기 위해 어떠한 조건이 필요한지, 

어떻게 납득을 해야하는지 도움을 청하고있는 태도이다.

그렇지만 여인은 천사의 설명을 듣고나서는 더 이상의 망설임도 없이 

전존재를 투신한 믿음의 응답으로 훌쩍 건너뛴다.

 

자신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음에도 

기존의 지식과 일반적인 소문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뜻을 듣고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오도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밖의 성경에 드러나있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뜻모를'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어떠한 자세로 알아들으려고 노력해야 하는지를 모범 삼을 수 있다.

 

마리아처럼 곰곰이 생각해보고,  설명도 듣고,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하면서

즉 충분히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가려보려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즉각적으로 알아내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마음에 간직하고 때때로 되새겨보면서 일생을 그 의미를 찾아,

그것에 자신을 맞추려고 애를 써야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에게서도 발견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는

예수님께서도 일생동안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찾았던 모습이 잘 그려져있다.

그 책에서 그분은 생애 전반은 물론이고 십자가에 매달린  최후의 순간까지도

하느님의 뜻을 물었고, 당신의 모든 것을 그 뜻에 맞추셨다.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오늘 제2독서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의 몸의 희생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희생을 통해 당신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이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교황 요한 23세도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하느님의 뜻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의 뜻을 위해 하느님의 뜻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우리의 뜻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생을 아버지의 뜻을 찾아 그 뜻대로 당신을 바치신 예수님. 

일생을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뜻을 찾고, 살아내신 성모님.

그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느님의 뜻을 입에 올리고,

너무나 가볍게 하느님의 뜻을 제맘대로 도구화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반성해본다.

 

 

 

 

 카알 오르프의 칸타타 <세속의 찬가> 중에서
Carl Orff (1895 - 1982) / '방황하는 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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